[강위원의 포토차이나] 허공에 매달린 듯…’현공사’
산서성(山西省) 혼원현(?源縣) 금룡협(金龍峽) 계곡은 중국 오악중 하나인 북악의 항산(恒山)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이 계곡의 깊은 절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계곡이 크게 굽이치는 곳의 절벽 중간에 새집처럼 매달려 있는 건축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현공사(懸空寺)이다.
현공사는 글자 그대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이는 절이다. 이 절은 중국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가급 중점풍경명승지 중의 하나로 4A급(5A급이 최고) 관광구역이며 산서성의 5대 관광단지, 10대 절경 중 하나이다.
절의 앞쪽 절벽에는 시멘트로 잔교를 이어 홍수 방지와 관개용으로 건설된 댐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입장료를 따로 받는다. 댐의 높이는 69m, 집수 구역은 상당히 넓다. 댐이 없었다면 상류의 모든 물이 한꺼번에 이 좁은 금룡협을 통과할 것이다.
댐의 반대쪽 절벽 하단에 잔교를 설치한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저곳의 잔교를 이용해서 계곡을 통행하였을 것이다. 절벽 사이의 계곡길이라 말이나 노새를 이용한 달구지가 주 교통수단이던 시절 홍수나 낙석 등으로 얼마나 많은 사고가 있었을까?
북위(北魏)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그의 제자인 이교(李膠)에게 공중에 매달린 절을 남기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래서 이교는 서기 491년인 북위 태화 15년에 도교적인 의미를 가진 현공사(玄空寺)라는 사찰을 지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현공사(懸空寺)이다.
현공사의 현존하는 건축물은 유조전(有朝殿), 회선부(會仙府), 벽하궁(碧霞宮), 순양궁(純陽宮), 루태정(樓颱亭) 등 약 40여 간이 있으며 유물로는 구리나 철, 돌과 진흙 등으로 빚은 80여 개의 조각상이 있다. 그중 일부는 예술성이 뛰어나 보인다.
대웅보전에서 기둥과 대들보가 만나는 곳에는 뿔이 있는 귀면(鬼面)이 장식돼 있다. 운강석굴에서 이와 비슷한 장식을 본 듯하다. 혹시 서역에서 전래한 초기불교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공사를 들어가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한꺼번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한다고 한다. 입구에는 이백의 글씨로 유명한 ‘장관(壯觀)’이라는 글이 붉은색으로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다. 명나라의 유명한 여행가 서하객(徐霞客)도 이곳을 보고 ‘천하거관(天下巨觀)’이라고 했다고 한다.
왼쪽 조그만 문이 절의 입구이다. 입구의 대문에 문고리 장식이 특이하다.
절은 낭떠러지의 암벽에 사각형의 깊은 구멍을 뚫어 굵은 각목을 수평으로 박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후 그 하중을 견디기 위해 수십 개의 기둥으로 받침대를 세웠다. 건축물들은 하중을 줄이기 위한 설계가 반영되었다. 중량이 많이 나가는 대들보는 생략되거나 최소한으로 설치되었고 기둥과 대들보가 하나로 결합되었다. 지붕을 받치기 위한 공포도 하중을 줄이기 위하여 생략되었다.
공포가 생략되고 양쪽 두 기둥 사이 가운데 난간의 중간 기둥을 위로 길게 올려 중간 지붕의 서까래를 받쳐 지붕의 하중을 지탱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로의 긴 지지대를 전체 건축물 아래에 세워 전체 건축물 하중에 대한 기초적인 보강을 하였다.
서까래의 끝에는 용머리의 장식을 달았고 그 끝에는 풍경을 매달았으며 처마의 끝부분에 잡상을 설치하였다.
현공사가 전반적으로 지붕의 장식에 많은 신경을 쓴 것은 절의 구조상 지붕을 내려다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며 지붕의 내부에 있는 천정은 목재로 마감하였는데 자연의 결을 그대로 살린 것이 어떠한 공예품보다 아름다웠고 정교하고 조화롭기 그지없다.
또한 절벽의 기복에 따라 건물들을 절묘하게 배치하고 연결하였다. 비교적 절벽의 공간 밖으로 크게 돌출된 곳에 세워진 누각은 팔작지붕인데 박공이 개방되어 있고 누각의 네 벽은 벽 문이 없는 터진 공간으로 처리되었다. 이는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마루부분에는 꽃과 기하학적인 식물의 잎과 줄기로 장식된 마루기와를 사용하여 멋을 부렸다. 지붕의 용마루 양 끝에는 치미라고 부르는 대형의 장식기와를 부착했으며, 내림 마루의 시작과 끝 역시 정교한 용머리 장식을 배치하였다.
기와는 황실에서 사용하는 황금색 유리기와를 사용하였고 지붕 끝단에는 봉황 무늬와 귀면 무늬의 암·수막새를 푸른색 유리기와로 색을 달리하여 대비의 효과와 함께 산뜻하게 마감하였다.
절의 가장 높은 부분은 삼교당(三敎堂)이며 지상에서 높이가 60여m에 달한다. 통로가 좁고 난간의 높이가 매우 낮아서 통행이 불편하다.
삼교당에는 공자와 노자, 부처가 좁은 공간 안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있다. 유교와 불교, 도교가 한자리에 있는 것이다. 입장권 뒷면에도 ‘삼교합(三敎合)’이라고 명시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은 각(閣)이나 전(殿), 당(堂)으로 불리지 않고 사(寺)로 불린다. 그것은 이 절에 대웅보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삼 중국인들의 합리적인 사고와 불교가 가지는 포용력을 느끼게 한다.
명나라의 유명한 시인 왕담초(王湛初)는 이절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는데 절의 입구에 새겨져 있다.
誰鑿高山石(수착고산석) : 그 누가 높은 산 바위 다듬어
凌虛構梵宮(릉허구범궁) : 하늘 높은 곳에 절을 지었나
蜃樓疑海上(신루의해상) : 구름바다 위 신기루 같은데
鳥道沒雲中(조도몰운중) : 험한 길 구름 속으로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