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마오쩌둥 미술품’ 불티나게 팔린다
중국 수도 베이징을 방문하는?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먼저 찾는 곳 중 하나가 천안문광장이다. 천안문광장에는 우리나라 국회에 해당하는 인민대회당 등 사회주의 양식의 건물이 있고, 서양식 건축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오페라하우스, 중국적 건축물을 상징하는 천안문이 우뚝 서있으며 그?뒤로는 고궁이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처음 베이징을 방문했던 1990년부터 천안문에 걸려있는 모택동(毛澤東, M?o Z?d?ng)의 초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등소평이 중국의 실권자였다. 그는 모택동에 의해 두 번이나 유배당하고 연금됐으며,?대학생이던 그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창문에서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되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은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학교당국에 대대적으로?도전하기 시작한 1966년부터 모택동 추종자인 4인방이 축출되고 그가 사망한 1976년까지 수많은 중국인들을 고통과 좌절 속으로 몰아넣었다. 또 수많은 인재를 포함한?국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는 모택동을 마오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중국인들은 모택동을 얘기할 때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중 공칠은 장정을 완수해 사회주의 국가인 신중국을 건설하고 인민을 해방한 것을 의미하며, 과삼이라 함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것을 뜻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민 대부분은 “해방이 되고는 모택동 주석을 잊지 않고, 부자가 되어서는 등소평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삶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중국 인민들이 모택동을 추앙하는 것은 인민해방에 대한 그의 업적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간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야릇한 향수 때문일까?
최근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미술품과 골동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베이징만 하더라도 798예술구를 비롯해 주창(酒廠, ji?ch?ng)예술구, 환철(環鐵, hu?nti?)예술구, 초장지(草場地, c?och?ngd?)예술구, 좌우(左右, zu?y?u)예술구, 송장(宋庄, s?ngzhu?ng)예술구, 베이징 1호지 국제예술원구 등과 관음당화랑가나 중국미술관을 비롯한 다양한 화랑들이 있다. 그리고 판자웬(番家園, f?nji?yu?n)과 보국사(保國寺, b?ogu?s?)등 골동품시장들을 통해 수많은 미술품들이 전 세계로 거래되고 있다. 봄가을로는 아트 페어와?미술품 경매시장이 특급호텔 대회의실 등에서 자주 열린다.
중국의 역사나 문화적 배경, 경제규모로 보아 별 이상할 것이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미술품들을 보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모택동 주석이 예술품의 모티브가 된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액수에 관계없이 거래된 숫자만 본다면 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미술품으로는 기네스북에도 오를 수 있는 기록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품의 내용은 다양하다. 젊은 시절과 장년기의 초상사진에서부터 장정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제작된 포스터 인쇄물, 중국 전역에 서있는 모택동입상의 복제품, 배지나 기념메달과 현수막, 그리고 모택동 주석을 모티브로 한 현대작가들의 회화적인 창작품 등이 있다. 그것들이 골동품 시장이나 아트페어 현장, 심지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화랑에서도 전시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녕성의 봉황성 부근에 있는 봉성시 대리수촌에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재현한 ‘청년점’이라는 이름의 민속촌은?관광상품이 되고 있다.?모택동 주석의 포스터나 배지, 신문 등으로 인테리어를 해 장식품으로 전시 판매되고 있으며, 당시의 척박한 음식도 판매되고 있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느껴보려는 사람들로 이뤄진 관광객이 가족단위나 그룹단위로 몰려오고 있다.
연예인도 아닌 국가 주석 초상이 들어있는 것이 미술품으로 개인에게 판매되고 전시되고 소장 되는 일은 아마도 전무후무한, 미술사에 길이 남을 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