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운강석굴이 중국 3대석굴인 이유는?
감숙성(甘?省)의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 하남성(河南省)의 용문석굴(??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불리는 운강석굴은 2001년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중국 불교미술의 정수이다.
대동의 옛 이름은 평성(平城)으로 선비족(鮮卑族)이 화북(華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호를 위(魏)라 하고 398년 수도로 정한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중국북방의 중요 도시로 손꼽힌다. 역대 25명의 황후와 9명의 황비를 배출한 미인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석탄 생산거점의 소도시에서 관광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439년 5호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완성한 북위의 태무제는 훼불 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그의 손자인 문성제는 불교 부흥에 앞장서서 460년 도읍지인 지금의 대동시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무주산(武周山, 지금의 운강) 남쪽 기슭에 산을 파고 석굴을 조성하였다.
석굴은 45개의 동굴과 252개의 동굴감실로 이루어졌는데 그 속에는 5만1000여점의 석조 불상이 현존하며 동서로 약 1Km 정도 이어져 있다. 그 중 가장 큰 불상은 17m에 달하고 가장 작은 것은 몇 cm에 불과하다. 석굴이 조성됐던 5세기 후반 대동은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로 실크로드의 한 끝에 있으면서 인도와 서역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의 문화와 불교예술을 연결하는 집결지였다.
운강석굴의 개착(開鑿)은 북위 문성제 화평초년(460년)에 시작하여 효문제 태화 18년(494년)까지 대부분 완성되었으며 이후 지방 호족들에 의해 효명제 정광 5년(524년)까지 이어졌다.
후대에는 계속적인 중수가 이루어지는데 당(唐) 정관 15년(641년) 및 요(遼)대에 대규모의 수리가 있었으며 동굴 앞 절벽 면에 대형 복조 처마를 연결하여 운강 10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금, 원, 명, 청 때에도 수리가 있었다.
동굴의 형식은 대개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초기에 개착된 담요 5굴이다. 이는 북위가 대동에 정도하고 나서 62년 후인 460년 서역에서 초빙된 고승인 담요(曇曜)대사의 주관 아래 460~46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운강석굴의 시작이다.
담요오굴은 <위서 석노지>에 따르면 선제(道武帝, 明元帝,太武帝, 太子晃)와 금상(今上, 文成帝)을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최대의 석굴은 돔형의 제19동인데 높이 16.48m의 좌불본존, 주위 벽에 천불, 좌우에 협시불(脇待佛)이 있는 협동(脇洞)으로 되어 있다.
제20동의 본존은 높이 13.46m의 좌불인데, 앞 벽이 떨어져 나가 노천에 좌정하고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당시 불교 예술은 중원에 전해진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담요 5굴의 공사를 책임진 장인들은 대부분 서역에서 왔다. 그래서 담요오굴에 조성된 초기의 불상들은 대체로 인도 불교예술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평면이 타원형이고 조각상 위주의 석굴. 불상은 크고 높으며 웅장하다.
5개의 굴은 모두 말발굽형 평면이고 옛 인도의 초옥형식인 반원모양의 궁륭천장(穹?天障)이다. 문 하나에 1개의 높은 창이 있으며 외벽에는 천불을 조각해 가득 채웠다. 굴 안의 주요 위치에 삼세불이 높고 커다랗게 자리한다. 석굴안의 주상은 크고 웅장해서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주상 양 옆의 불상은 서거나 앉아 있는 모습으로 주종의 차이가 현격하다.
운강의 제2기 공사는 효문제 재위(467~494년) 기간에 조성된 것으로 화려한 석굴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석굴은 대부분 쌍굴 형식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제 1·2굴, 제 5·6굴, 제 7·8굴, 제 9·10굴의 4조는 모두 쌍굴로 구성되었으며, 제 11·12·13굴은 1조 3굴이다. 이 석굴들은 구조적인 면에서 소재, 의복,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잡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외부에서 유입된 불교 석굴의 형식을 중국화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 조소기법에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페르시아의 예술이 합쳐져서 실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중에서도 5, 6굴은 운강석굴 중앙에 위치하며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제 5굴의 후실 북벽의 주불은 결가부좌를 한 석가모니불이고 높이는 17m로 운강석굴 가운데 가장 큰 대불이다.
굴 안 벽면에는 많은 감실과 불상을 조각해 가득 채웠는데, 대소 불상이 2300여존에 이른다. 제 6굴은 대형 탑묘굴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평면은 정방형이며 후실 중앙에는 2층 네모꼴 탑 기둥이 조출되었는데, 바로 굴 꼭지까지 닿으며 높이는 14.4m에 이른다. 주요한 불상은 돌출시켜 조각하였으며 인물군의 형상이 대단히 많다.
운강석굴 조성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효문제가 도읍을 낙양으로 옮긴 이후 하급 관리나 신자, 승려들이 중소 규모로 대량 조성했다. 석굴 동서의 절벽 끝과 중간의 낭떠러지 위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소규모 석굴 외에도 이전에 파놓은 벽면의 빈 곳을 이용해서 감실 속에 불상을 조성했다. 규모는 이전보다 축소되고 간소화되었지만 그 배치는 정연하고 조각도 더욱 정교해졌으며 그 수가 200여좌에 달할 정도로 많다. 소형 석굴 안에는 6세기 초에 칠한 색채들이 지금까지 적지 않게 보존되어 있다.
운강석굴 가는 길은 북경에서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북경에서 대동까지 6시간, 중국대륙에서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대동 역에 내려서는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근의 문화유적지를 함께 보려고 한다면 택시를 대절해서(오전 6시에서 오후 6시까지, 300위안 안팎)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