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의 현장
베이징으로 연구년을 떠나면서 꼭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곳 중 하나가 ‘열하’였다.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를 읽고 난 뒤 감동의 현장을 느껴보고 싶어서다. 열하일기는 연암의 종형 박명원이 청의 건륭제 칠순잔치에 진하사로 가는 길에 연암이 동행하여 쓴 기행문이다.
그러나 중국 지도에 ‘열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승덕(承德)의 옛 지명이 열하(熱河)라는 것을 알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베이징에서 승덕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동직문 시외버스터미날에서 승덕행 버스가 수시로 출발하고, 삼원교에서는 합승이 다닌다. 그리고 북경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도 있다.
그러나 카메라 가방과 노트북 등 무거운 장비를 둘러 메고 5시간이 걸리는 250km의 먼 길을 버스나 비좁은 합승, 침대차가 아닌 열차에서?견디는 것이 우선 필자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용차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가려던 곳은 연암이 북경에서 순의(順義)·회유(懷柔)·밀운(密雲)을 거쳐 고북구(古北口)와 열하에 이르는 1780년 8월5일부터 9일까지 5일간의 기록인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북경 시내에서 오환로(五環路)를 거쳐 북경과 승덕을 잇는 경승공로를 따라갔다. 밀운은 하루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넜다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현장이었지만, 연암이 건넜다는 구도하(九渡河)는 현재 모두 밀운댐과 회유댐에 잠겨 북경시민들의 수원지가 되었고 곳곳에 관광객들이 들르는 생선요리집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연암이 처음 장성을 만난 곳은 명나라 멸망의 현장인 산해관이었다. 그때의 격화된 감정이 북경과 열하·세북을 가르는 고북구 장성을 만나면서 폭발하였다. 아래는 ‘야출고북구기’에 수록된 글이다.
“관문을 나와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는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꺼냈다. 물이 없었다. 밤샘 때 마시려 아껴둔 술 몇 잔을 안장에서 꺼내어 붓을 풀고 별빛에 붓을 들었다.” ‘건륭45년(1780) 경자 8월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三更朝鮮朴趾源過此)’ 재빠르게 써내려간 연암의 글이다. 그러나 그 현장 역시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북구를 지나는 국도를 따라가면 조하(潮河)와 만난다. 조하는 밀운(密雲)댐으로 흘러든다. 조하를 건너 북쪽으로 파극십영(巴克什營)이라는 톨게이트를 거쳐 반간방(半間房)·삼간방(三間房)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금산령(金山嶺) 장성 입구를 알리는 관광안내판이 보인다. 고북구 남방 10km지점에서도 사마대(司馬臺) 장성의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사마대장성이나 금산령장성은 북경의 팔달령(八達嶺) 장성과 건축 양식이 같으며 최근에 이 지역에서 보수 공사를 한 후 관광지로 선포한 것이다.
연암은 “8월9일 사시(巳時)에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쌍탑산(雙塔山)과 봉추산(捧鎚山)을 먼발치서 보았다”고 간략하게 적고 있다.
두 곳 모두 승덕 10경으로서 독특한 형태미와 설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삭도(索道)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쌍탑산은 승덕 시내에서 약 10km 떨어진 난하(?河)의 동쪽언덕에 있으며 사랑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간직한 남녀를 상징하는 두 개의 바위가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다.
봉추산은 경추봉(磬錘峰)이라고도 부르며 해발 596m의 정상에 봉우리 모양의 거대한 남근석이 승덕 시내를 내려다보고 도도하게 우뚝 서있다. 힘차고 당당한 모습이다.
남근석의 직경은 윗부분이 15.04m, 아랫부분이 10.7m이고 높이는 38.29m, 무게는 1만 6천 톤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처였다. 경추봉 가는 길목의 바위벽에는 7개의 라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매끄럽게 닳은 부분이 보인다.
피서산장(避署山莊)은 강희제(1662~1772) 이후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이 매년 4월에서 9월까지 묵었다고 하는 여름행궁으로 명실공히 청나라 제2의 수도였다. 강희42년(1703)에 기공해 건륭57년(1792)년에 완공했으며 이화원보다 면적이 큰 564만㎦에 이른다.
산장은 크게 궁전(宮殿)구역와 수원구(水苑區)·평원구(平原區)·산구(山區) 등 비원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장은 경승공로와 적승공로를 휘감아 흐르는 무열하(武烈河)를 안고 있다(북경과 승덕, 승덕과 적봉赤峰을 연결하는 도로이다). 산장내 수원구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아 옛부터 열하(熱河)라고 불렀다는 열하천(熱河泉)이 흐르고 있다.
산장은 여름행궁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남하하는 길목을 막아서고 있다. 또한 멀리 티베트와 몽골에서 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라마불교의 교세를 유치해 대립과 갈등을 무마하였다.
그리고 열하의 어디에도 요새를 두지 않았지만 강희제는?1685년 열하의 북쪽 150km쯤에 광활한 목란위장(木蘭圍場)땅을 사냥과 사격을 위한 연병장으로 닦았다. 피서산장의 숨은 목적은 바로 ‘수원고변(綏遠固邊)’ 즉 먼 곳을 회유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행정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건륭 때 편찬한 3,457종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피서산장의 문진각(文津閣)에서 완성돼 그곳에 수장됐다.
승덕의 또 하나의 자랑은 외팔묘(外八廟)를 들 수 있다. 외팔묘는 강희 52년(1713년)부터 건륭 45년(1780년)에 걸쳐 건설된 11개의 사원 중 산장의 바깥쪽 8군데에 건립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들은 대부분 소수민족들을 종교적인 융화정책으로 회유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부인사(溥仁寺), 보악사(普樂寺), 안달묘(安達廟), 보령사(普寧寺),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 보타종승묘(普陀宗乘之廟), 수상사(殊像寺) 등 일곱 개의 사원이 남아 있다. 이중 보악사와 보녕사는 티베트식 사원이다. 그리고 보녕사에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높이 22.8m의 목조천우천안관음보살상(木彫千牛千眼觀音菩薩像)과 십팔나한상(十八羅漢像)이 안치돼 그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