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위한 변명?
김지운 감독의 <밀정> 대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가 뜨거운 맞대결을 펼칠 거라는 많은 이들의 예상은 보란 듯 빗나갔다. 안톤 후쿠아 감독의 서부극 <매그니피센트 7>이 가세한 3파전도 불발에 그쳤다. 개봉 10일째이자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6일, <밀정>은 86만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500만선에 임박했으나 <고산자>는 고작 12만여명에 그치며 70만선에 근접했을 따름이다. 정식 개봉 3일째인 16일 16만여명에 그치며 박스 오피스 3위에 머물러 있는 <매그니피센트 7>는 상영 스크린을 600개도 채 잡지 못하며 배급전쟁에서 패해, 힘겨운 승부를 펼칠 수밖에 없는 국면이다.
<밀정>과 <고산자>의 스크린 수는 1360여개와 530여개. <밀정>의 완승은 배급전에서 이미 결정된 셈이다. 복병은 뜻밖에도 <벤허>(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 찰톤 헤스톤 주연의 그 유명 대작(1959년)의 리메이크 사극. <고산자>와 <매그니피센트 7>를 제치고, 박스오피스·예매율·스크린 수 모두에서 <밀정>에 이어 2위에 위치하고 있다. 미처 보진 못했으나, 4시간에 달하는 기념비적 시대극을 어떻게 2시간여로 축약해 요리했을지 궁금하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고산자>가 스크린 수에서 <밀정>의 2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상영 총 횟수에서도 4분의 1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물적 열세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7분의 1가량밖에 안 되는 흥행 스코어를 거두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럴 정도로 영화가 졸작인 걸까. 어느 매체의 단언(<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왜 망할 수밖에 없었나?)처럼, 영화는 과연 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관람객 평점 8.28로 만족도도 결코 낮은 건 아닌데도…….
이제 영화 <고산자>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 많을 테니 보도자료를 빌려 간략히 소개하면, 지도가 곧 권력이자 목숨이었던 시대, 조선의 진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두 발로 전국 팔도를 누빈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년·순조 4년 추정~1866년·고종 3년 추정, 차승원 분)를 축으로 펼쳐지는 팩션 사극이다.
하나뿐인 딸 순실(남지현)이 어느새 열여섯 나이가 되는지도 잊은 채 그는 지도에 미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에도 아랑곳 않고 오로지 지도에 몰두한다.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들과 나누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대동여지도의 완성과 목판 제작에 혼신을 다한다. 하지만 안동 김씨 문중과 대립각을 세우던 흥선대원군(유준상)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손에 넣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고….
영화는 2009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박범신의 원작 <고산자>(2009, 문학동네)를 토대로 빚어졌다. 워낙 기록이 없어 소설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김정호의 발자취를 더듬어, 역사 기록이 빠뜨린 부분을 인문학적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복원해냈다. 평생 시대로부터 따돌림 당했던, 백성에게 지도를 돌려주고자 하는 높은 뜻을 품고 있던,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산을 닮고 그에 기대어 살고 싶어했던 김정호의 모습”을 담았다.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김정호의 생애를 복원함으로써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상과 계속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뼈저리게 지켜온 강토에서, 나와 우리가 지금 계속 이어 살고 있다는 큰 위로와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위 단락의 ‘소설’을 ‘영화’로 바꾸면, 영화 <고산자>의 작의로도 손색없다.
“역사기록이 빠뜨린 부분을 인문학적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복원해냈다”는 대목에 ‘영화적’이라는 수식어만 첨부하면 족할 터.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잃는 것과 얻는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 영화는 영화 매체만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한다.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찍었다는 백두산 천지, 합천 황매산, 여수 여자만, 마라도 등 도입부에 나오는 한반도의 절경 이미지들이 대표적이다.
필자도 그렇거니와, 영화를 잘근잘근 씹듯 맹비판을 한 어느 평론가(황진미)도 도입부 10분만은 대작이요 걸작이라며 칭찬한다. “절대로 보지마세요. 차승원씨도 좋아하고, 예고편 영상미에 반해서 남편 보기 싫다는 거 억지로 끌고 왔는데, 영화 다 보고 싸울 뻔 했네요 너무 재미없어서. 연출, 시나리오, 연기, 다 엉망”(부분 수정)이라며 10점 만점에 1점을 부여한 한 관객(종합 포털사이트 네이버 참고)마저도 “우리나라 방방곡곡 자연풍광 나오는 게 젤 재미있어요”란다.
그 기막힌 풍광만으로 영화 전체를 재단·평가하긴 물론 무리다. 그 외에도 강우석 특유의 ‘튀는’ 유머?황진미 등은 ‘아재 개그’라고 평했다?와 ‘우직한’ 드라마가 있다. 그 유머에 대해 감독은 한 인터뷰(경향신문 13일자 23면 참고)에서 이렇게 항변한다. “이런 유머가 있어서 중·후반의 드라마가 살아난다. 유머 없이 지도 만드는 이야기만 제시하면 일반 관객은 지루해한다. 초반부의 유머에 웃고 재밌어하다가 중·후반에 뒤통수 얻어맞는 관객이 있을 것이다. 관객이 차승원, 김인권에게 기대하는 유머가 있다. 그 기대를 배신하면 안 된다.”
의도와 수용 사이에는 으레 불일치가 발생하기 십상인 법, 흥행 수치로 판단컨대 감독의 의도는 기대한 바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본 내게도 그 유머는 다소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위 인터뷰에서 기자가 “주연 차승원의 <삼시세끼> 유머나, ‘내비게이션’ 유머가 다소 튄다는 말이 있었다”고 질문을 던진 것도 그래서일 공산이 크다. 유머의 톤 앤 매너를 조금은 더 정치하게 조율하고, 그 수위도 다소 낮췄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그 유머가 그 이후 펼쳐질 진지한, 혹은 심각한 드라마의 무게를 상쇄시키기 위해 필요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쉽기는 지나치게 정공법적인, 우직한 드라마투르기(극작법)도 매한가지다. 영화는 플래시백이나 교차·병행 편집 등 그 흔한 영화적 (편집) 기교들을 배제한다. 그만큼 영화보기의 아기자기한 재미를 포기했다고 할까. 드라마는 시종 일직선적으로 우직하게 달려간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상술하진 않겠으나 최후의 순간, 김정호가 아닌 바우 캐릭터(김인권)를 통해 영화가 목표했을 묵직한 감동·주제를 안겨준다.
上記 포털에서 10점 만점을 준 한 관람객이 “마지막에 한방이 있네.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린다”고 하더니만 다름 아닌 그 ‘한방’이다. 너무 늦게 찾아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나, 2시간쯤은 기다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임팩트!
반론도 나올 수 있다. 한 후배 평론가도 말했듯, 그 ‘한방’을 포함해 영화 전반에 내포돼 있는 영화의 자의식 넘치는 민족(주의)적 색채 및 기운이 다소는 부담스럽고 피곤하다고. <명량>을 비롯해 <암살>, <동주>, <귀향>, <덕혜옹주>, <밀정> 등 시대극이건 현대극이건 일련의 국산영화들을 관류하는 반일적 내지 항일적, 아니 정확히는 극일적 문제의식에서 연유하는 교훈적 메시지가 거슬린다고 투덜거릴 수도 있다.
문득 밀려드는 의문. 그렇다면 영화 <고산자>의 시나리오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주제도 그렇고, 지나치게 투박한 게 아닐까. 바야흐로 세련된 디지털의 시대에, 세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소박하기 짝이 없는 아날로그적 감성에만 다가가려 했던 건 아닐까. 그래 영화가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게 다가선 건 아닐까, 적잖은 전문가들은 말할 것 없고 대중 관객들에게도. 나는 외려 그래서 더 영화를 즐길 수 있었거늘, 크고 작은 아쉬움에도.
고백컨대 나는 영화 <고산자>의 그 아날로그적 투박함이 못내 좋다. 평론가로든 관객으로든 한 개체로서든, 내가 영락없는 아날로그적 인간인 탓이다. 일찍이 그 흔한 블로그도 한 적 없고, 시대의 대세라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팟캐스트 등을 한사코 거부해온, 어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부류 말이다. 세상의 흐름인 디지털은 좋게 말하면 세공이요 가공이며 창작이나, 나쁘게 말하면 조작이요 거짓 아닌가. <밀정>이 감독의 이름값을 하는, 클래스가 다른 휴먼 시대극이긴 해도 그 과도한 디지털적 멋스러움이 거북살스럽기도 한 건 내 특유의 아날로그적 촌스러움 때문이다.
<매그니피센트 7>의 신명 나는 활극이 흥미롭기는 하나, 그보다는 지금의 눈으로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1960년 산 오리지널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존 스터지스)에, 그 오리지널이 토대로 삼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걸작 시대극 <7인의 사무라이>(1954)에 더 마음이 가는 것도 그 때문일 듯.
헌데 영화 <고산자>의 연기가 엉망이라? 제 아무리 인색하게 평해도, “엉망”이라는 평은 과하지 않을까? 훤칠한 체구에 도시남 느낌 물씬 풍기는 차승원이 19세기 후반의 서민적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연기를 못했다고 평하긴 주저 된다. 유준상, 김인권, 남지현, 신동미 등 다른 주·조연들도 그렇다. 모두 평균 이상의 제 몫을 해낸다.
개별 연기도 그렇고, 연기 앙상블에서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연기 관련 쟁점은 연기력보다는 캐스팅에 대한 기대치나 효과 등에서 비롯된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면, 캐릭터와 연기력에 의거해 기용됐을 출연진에 눈길이 상대적으로 덜 간다는 것.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개별 배우들의 이미지나 연기력과는 무관하다. 그들이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거의 예외 없이 목하 이 땅의 대중 관객들의 영화적 욕망이 소구하는 지점에서 일정 정도 내지 상당 정도 벗어나 있는 배우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련다. 영화에서 김정호가 왜 그렇게 지도에 집착하는지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데 과연 그럴까? 솔직히 나는 왜 그런 질문이 나오는지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내게는 그 이유들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여겨져서다. 자료에 따르면, 김정호는 “평생 국토정보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 매진한 진정한 학자이자 출판인”이란다.
소설도 그렇겠지만 영화는 김정호의 그런 면모를 더 할 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극화해낸다. 어릴 적 홍경래의 난 진압군으로 투입된 아버지가 지도의 오류 탓에 때 이른 죽음을 맞게 된 가슴 아픈 경험하며, 영화의 말미 대사에 직접적으로 나오듯 “가슴이 뛰어서”, 지도는 결코 국가 상층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두루 널리 사용함으로써 생활의 편리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과 철학 등등, 대체 이들보다 더 이상 그 어떤 대단한 이유들이 제시돼야 한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