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의 ‘블랙머니’···사회(성) 희비극에 응원을 보내며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검찰 내에서 거침없이 막 나가는 문제적 검사로 명성 자자한, 서울지검의 일명 ‘막프로’ 양민혁(조진웅 분)은 담당 피의자가 자살하는 통에 성추행 검사로 몰리는 등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한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그 피의자가 대한은행 헐값매각 사건의 핵심 증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근거는 의문의 팩스 5장이다. 자산가치 70조 은행이 1조 7천억원의 ‘푼돈’에 넘어간 희대의 사건 앞에서 그는 문제의 해외 펀드사를 비롯해 글로벌 대형로펌, 대한민국 금융감독원 등이 뒤얽힌 거대 금융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블랙머니> 영화 포스터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 1985>(2012) 이후 7년만에 빚어낸 신작 <블랙머니> 대강의 줄거리다. 감독의 변에 밝혔듯 “IMF 이후, 외국자본이 한 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후 곧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떠난 사건을 토대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엮어 극화한” 팩션영화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2003~2011년의 ‘론스타사건’이다.

론스타(극중 스타펀드)는 미국계 투자자본이며, 은행은 (구)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이다. 우리 사회에서 실제 발생했던 경제·금융사건에 허구를 가미해 영화화했다는 점 등에서, 1997년의 외환위기를 극화한 <국가부도의 날>(2018, 최국희) 그 이후라 할 법하다. 일련의 기시감이 들 성도 싶다. 그 기시감은 그러나, <블랙머니>의 약점이거나 흠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두 영화를 연관 지어 볼 때 한층 더, 영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뿐 아니라, 영화 보기의 감흥 역시 강해지기 때문이다. 감독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제는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아닌가. 그로 인해 우리네 삶의 희비가 드라마틱하게 엇갈리곤 하지 않은가.

정지영 감독

정지영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대중들이 잘 모르는 경제순환 논리의 이면을 제시하고 싶었다. 주인공과 함께 사건을 따라가면서 관객들이 뜨거운 여운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일찍이 천명했듯 ‘은행은 군대보다 무서운 무기’라는데,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의 금융자본주의가 경제를 잘 모르는 우리를 우롱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블랙머니>를 통해 제시된 내용이 전적으로 ‘진실’인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런 유의 팩션영화라면 으레 그렇듯, 소위 음모론적 주장들이 꽤 가미돼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눈여겨 직시하고 경청해야 할 지점이 수두룩하다. 영화의 내‧외적 설득력도 충분하다. 영화 오락적 재미도 넉넉하며, 영화 예술‧미학적 수준도 큰 주목감이다.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부러진 화살>(2011) 등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데 성공한, 대표 전작들 못잖다. 드라마를 펼쳐 보이는 솜씨나, 연기의 맛 등에서는 그 이상이다.

과장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110여분 내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제재의 육중함이 안겨줄 법한 부담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적절히 배치돼 있는 유머 코드가 그 무게를 상쇄시켜준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랬듯. <기생충>이 가족 희비극이라면, <블래머니>는 사회(성) 희비극이랄까. 그러고 보니 빼어난 플롯의 완급 조절 등에서 둘은 닮은꼴이다. 연기나 성격화(Characterization) 등은 또 어떤가.

현실의 그 누구와 연결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양민혁 캐릭터는 당장 <1987>(2017, 장준환)의 최 검사(하정우)를 연상시키나, 그 비중에서나 극적 동기 부여 등에서 압도한다. 조진웅은 생애의 연기를 펼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극과 희극 사이를 오가는 균형감에서 일품이다. <끝까지 간다>(2013, 김성훈)의 박창민과 비교될 텐데, 양 검사가 악당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 그 맛깔이 유쾌할 대로 유쾌하다.

잘 나가는 국제통상전문 변호사 김나리 캐릭터와, 이하늬의 인물 소화도 그 못잖다. 전작 <극한직업>(2019, 이병헌)의 장 형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깊이‧크기를 만끽시켜 준다. 우리 영화에 그와 같은 여성 캐릭터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캐릭터의 탄생’, ‘이하늬의 재발견’에 값한다. 상술하진 않겠으나, 현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으로 나아간 결말부 처리도, 기대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하지만 <블랙머니>가 내게 선사한 가장 큰 감동은, 상기 영화적 덕목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감동은 지금도 여전한 감독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서 기인한다. 정지영 그는, 어느덧 70대 초반이다. 우리 나이로 74세다. 그 나이에 <블랙머니>처럼 대중적 호응과 비평적 성과를 동시에 일궈낸 수작을 발표한 감독이 이 땅에 있었던가? 임권택이란 ‘예외’ 말고는 없다. 1년 선배 이장호 감독이 5년 전 <시선>을 선보였으나, 1만선을 겨우 넘는데 그쳤다.

영화의 사회 비판‧고발성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정지영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다. 50, 60대만 되도 영화 만들기가 만만치 않은 풍토에서, 70대에도 그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수작을 만들어냈으니 어찌 그렇다 평하지 않겠는가. 후배 감독들이 귀감 삼아 마땅하다. 데뷔작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 이래 그의 전작(全作)을 거의 다 봐온 평론가인 필자가, 감독 정지영에, 그의 신작에 새삼 주목하면서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그의 다음 영화를 벌써부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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