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의 문제적 괴작 ‘버닝’에 빠지다
<버닝>의 영화적 가능성들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한정해 자신의 해석들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 간의 이창동 영화들과는 다른, 음악 등 사운드 연출의 섬세함을, 마냥 외연·표면·기표 안에서 머무는 현실적인 종수와, 메타포·비유·기의 안에서 살아온 초현실적·재즈적인 벤, 그 둘 사이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무질서적인 해미 등 세 캐릭터의 개별성격화 및 상호플레이, 그리고 그 세 캐릭터를 열연하는 세 출중한 배우들의 주목할 만한 연기 등, 청·시각 등 내러티브를 넘어 빛을 발하고 있는 영화의 다른 층위들의 참맛도 만끽해보라는 것이다. 영화의 괴작스러움이 서서히 드러날 테니 말이다.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문화콘텐츠 비평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시> 이후 8년만에 선보인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은 한국영화사에서 과연 어떤 영화로 자리매김될까. 일찍이 어느 매체에 밝혔듯,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나 한국영화 계보에서나 이창동이 아니면 빚어낼 수 없을, 흉내 불가의 괴작”, “이창동만이 형상화 가능했을,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특별한 세 청춘에 관한 독창적 초상화”로, “죽음과는 그 함의가 다를 ‘사라짐’의 의미를 곱씹게” 하면서 말이다. ‘걸작’도 아니고, ‘괴작’이라?
5월 14일 VIP 시사에서 처음 만난 이후 한 달 가까이 나는, <버닝>에 ‘빠져’ 지내고 있다. ‘리틀 헝거’로는 성에 차지 않아 ‘그레이트 헝거’를 찾아 ‘사라진’ 영화의 해미(전종서 분)라도 된 것 마냥, <버닝>을 향한 허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우선 영화관을 찾아 영화를 3번 더 봤다. 2천쪽에 달하는 <1Q84 1/2/3>을 읽은 후 멀리 했던 하루키 소설들에 다시 손을 댔다. <버닝>이 토대 삼았다는 단편 <헛간을 태우다>부터 4번 읽었다. ‘하루키 월드’의 출발점인 첫 장편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도 다시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니다. 종수(유아인)가 좋아한다는 미국, 아니 세계문화의 거목 윌리엄 포크너(1897~1962)에도 도전 중이다. 집필 시에는 하루키가 그 존재조차 몰랐다는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를 필두로 중편 길이의 단편이면서도 그 소설적 야심·울림 등에서는 그 어떤 대하소설 못잖은 <곰>, “실험적인 서술기법, 강렬한 시각적 언어로 20세기 현대문학의 지형을 뒤바꾼” 포크너 최고 걸작이자 그에게 1949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결정적 장편소설 <소리와 분노>(1929), “폐쇄와 억압의 이미지, 성적 욕망 및 관음증 등을 통해 죄악에 대한 불감증에 빠진 현대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또 다른 대표작 <성역> 등을 읽었거나, 읽고 있는 중이다.
실은 그 정도가 아니다. 해미가 사라지기 전, 노을이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상의를 벗은 채 춤을 출 때 울려나오던 재즈 선율에 취해, 그 선율을 유튜브에서 찾아 듣고 또 듣고 있다. 재즈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의 즉흥 연주를 활용했다는 루이 말 감독의 걸작 흑백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7)의 OST 중 한곡(G?n?rique), 그 곡만이 아니다. 26분여의 그 OST를 족히 수십 번은 듣고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다른 앨범들은 물론 쳇 베이커, 존 콜트레인 등 지난 한 달 가까이 주로 들은 음악은 평소 때의 클래식이나 팝이 아니라 재즈였다.
어떻게 영화 한 편이, 한 관객의 생활을 이렇게까지 송두리째 뒤흔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걸까. 그것도 50년 가까운 영화 보기에, 이른바 ‘영화 스터디’에 뛰어든 지 37년, 영화평론 25년을 맞이한 50대 후반의 영화평론가의 삶을. 이러니 어찌 ‘괴작’(怪作)이라 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버닝>의 ‘괴작스러움’은 사실 이 정도 선에서 그치질 않는다. <버닝>을 향한 허기가 아직도 성에 차지 않고 있다. 그 허기가 과연 넉넉히 채워질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그야말로 ‘그레이트 헝거’다.
이창동 감독은 <시>로 도서출판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중 최고 한국영화로 뽑힌 뒤 2011년 2월 필자와 진행한 대담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영화는 그것 자체로는 완결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면 깨끗하게 완결돼 끝나잖아요, 해피엔딩이든 뭐든…. 거기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고 현실 일탈을 잘 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새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그런 게 영화의 기능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왠지 그게 싫은 거에요. 영화의 끝은, 영화가 극장 안에서 끝나지 않고 관객과 연결돼서 관객의 현실 속에서 끝나는, 관객의 삶 속에서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관객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결말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라고. 그는 “어쨌든 저는 관객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싶은 것이고, 완결인 것(같으면서도), 완결로 보이되, 그러나 끝이 아닌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서.
위 발언에 근거해 판단하면 <버닝>은 공동 각본가이자 연출가인 이창동 감독의 작의가 100% 투영·실현된 ‘완벽한’ 텍스트다. 하지만 해석·수용 면에선 그렇지 않다. 나를 비롯해 적잖은 이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올 제71회 칸영화제에서 본상 수상에 실패했다. 포털 ‘다음’의 국내 전문가 평가에서도 총 14명이 평점을 부여했는 바, 종합 평균 7.4점에 그쳤다. 4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3점쯤이다. 칸 현지 데일리 중 하나인 <스크린 인터내셔널> 10인 평자들로부터 얻은, 역대 최고점 3.8점에 훨씬 못 미친다. 1148명이 참여한 네티즌 평점도 7.1점으로 <초록물고기>(1997)부터 <버닝>에 이르는 6편의 전작(全作) 중 최하위다. 결국 감독의 작의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만은 하지 않을 수 없을 성 싶다. <버닝>은 전문가건 비전문가건 공히 상당 정도 몰이해·오독되고 있다는 것, 플롯 및 캐릭터를 둘러싼 내러티브적 해석이나 그 의미·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영화의 숱한 ‘매혹들’(Attractions)이 적잖이 간과·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칸영화제 본상이 아닌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HI,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Critics)상을 받는 자리에서 “영화 <버닝>은 현실과 비현실, 있는 것과 없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미스터리’였는데 여러분이 함께 그 미스터리를 가슴으로 안아주셔서 기쁘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이렇듯 ‘사라짐’과 더불어 ‘미스터리’는 <버닝>에 다가서는데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키워드들이다.
다시금 ‘미스터리’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수수께끼와 비밀에 싸여 있어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사물이나 사건”이요 “괴기스럽고 비밀스러운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한 작품”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느 주류 대중영화에서 찾듯 <버닝>에서 한 가지 정답을 찾으려 하거나, 자기가 찾은 답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것은 헛수고이기 십상이다. 하나의 답이 도출된다면, <버닝>은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영화가 삶의 우연성이나 아이러니, 불가사의 등을 극화해온 이창동 감독에 의해 빚어졌다면 더 말할 나위 없다.
해석은 물론 자유다. 하지만 텍스트의 정보 및 단서 등에 의해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과잉해석 내지 오독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영화에서 해미의 사라짐을 죽음으로 제한하는 것 또한 삼가야 한다. 죽음은 사라짐의 일부이지 동의어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해석처럼 해미가 정말 벤(스티븐 연)에 의해 살해된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사라져 언제 어떻게 다시 나타날지는, 평론가인 나는 말할 것 없고 작가이자 감독인 이창동도 단언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벤이 해미를 죽였다면 벤이 결국 싸이코 연쇄살인범이라는 의미일진대, 그 얼마나 싸구려 3류적 해석인가.
내 결론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버닝>의 영화적 가능성들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한정해 자신의 해석들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 간의 이창동 영화들과는 다른, 음악 등 사운드 연출의 섬세함을, 마냥 외연·표면·기표 안에서 머무는 현실적인 종수와, 메타포·비유·기의 안에서 살아온 초현실적·재즈적인 벤, 그 둘 사이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무질서적인 해미 등 세 캐릭터의 개별성격화 및 상호플레이, 그리고 그 세 캐릭터를 열연하는 세 출중한 배우들의 주목할 만한 연기 등, 청·시각 등 내러티브를 넘어 빛을 발하고 있는 영화의 다른 층위들의 참맛도 만끽해보라는 것이다. 영화의 괴작스러움이 서서히 드러날 테니 말이다.
다시 역설컨대 <버닝>은 문제적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출발해 문제적 작가 윌리엄 포크너로 나아가는, 문제적 감독 이창동만의 영화적인 너무나도 영화적인, 기념비적 모험이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문제적 괴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