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전찬일의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 작가 이숲 이렇게 읽다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

[아시아엔=박수영(이숲) 작가,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등 저자] 매혹적인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영화작가를 길러낸 ‘토양’을 상상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던 미지의 땅에 부는 바람과 햇살, 숲의 모양새와 강의 색깔 등.

가난한 대륙이든, 부유한 대륙이든, 그 땅에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들, 슬픔과 기쁨의 노래들. 세상의 ‘미’에 열광하는 나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와 다른 것들을 흠모하고 경외한다.

지난 두 해 동안 세상에 나온 영화 중에 내가 가장 열광한 두 영화가 한국영화이고, 그리하여 내가 한국적인 토양과 한국인들을 새삼 떠올렸다면 나는 원래 ‘국뽕’에 쉽게 취하는 타입인가? 내 이성을, 내 감각을 거세게 휘감으며 대체 내가 두 시간 동안 뭘 본 거지? 그 전율과 정체를 알고자 영화가 끝난 후에도 시공간을 이동하고 싶지 않았던 강렬한 기억.

이창동 감독의 <버닝>

<버닝>(2018) 그리고 <기생충>(2019). 이창동과 봉준호. 워낙 좋아하는 두 감독이긴 하나 이번엔 ‘급’이 달랐다. 두 영화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테마인 ‘권력’, 혹은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다. <버닝>의 테마는 <기생충>보다 훨씬 더 비가시적이다. ‘마이너리티’가 ‘메이저리티’의 농담에 현혹되어 그걸 ‘진실’로 믿고 그 (허구적인) ‘진실’을 좇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 포스터

인간세계의 추상적 진실의 한 단면을 과감히 길어 올려 영상화했으나 그 진가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무척 아쉬웠던 <버닝>. 그렇기에 이듬해 <기생충>이 칸의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나에겐 묘한 경쟁심이 일었다. <버닝>은 푸대접해놓고, 허, 얼마나 대단하기에, 하며 벼르고 보았던 <기생충>.

과연, 영화역사상 어떤 영화가 계급의 문제를 이토록 재기발랄하고 품위 있게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최고였다. 세계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었다. 나에겐 여전히 <버닝>과 함께.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

평소 인간으로서나 평론가로서나 흠모해왔던 전찬일이 펴낸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은 바로 봉준호를 길러낸 ‘토양’에 관한 전방위적인 보고서다. ‘봉준호’라는 인물을 이야기의 씨줄로, 영화작가로 커온 행적과 사건, 작품들을 날줄로 삼아 ‘봉월드’를 촘촘히, 그리고 풍성하게 완성시킨다.

책의 미덕은 참 많다. 우선, 영화작가로서의 봉준호의 문학적 수사를 감상할 수 있다. 섬세하고 모던하며 간결·명료하고 위트 있는 수사가 정돈된 구어체로 흘러나오고, 그 펜 끝에서 영화 속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탄생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 등을 썼던 외조부 박태원으로부터 ‘글발’을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백색인>(1993), <지리멸렬>(1994) 등 봉 감독의 초기 단편들에 주목을 환기시키고, 이때 이미 ‘봉준호스러운’ 테마와 미장센, 사회의식의 맹아가 싹텄음을 알려준 것도 큰 미덕이다. 18세기에 살았다면 대부분 파놉티콘 원형 감시망 속의 죄인들이었을 봉준호의 인물들의 변천사 또한 무척 흥미롭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지는 “하자 있는 무능한 인간들,” 광인들, 부랑자들. 그리고 <기생충>의 부자 가족까지. 가진 자든 가지지 못한 자든, 봉준호의 시야에 잡히는 인물들은 선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비틀리고 클리셰(cliché)는 걷어진다.

더욱이 그 인물들은 사회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진짜’ 인간으로 우리로 하여금 “시대를 목격하고 느끼게” 하며 사유하게 한다. <기생충>의 세 가족이 세계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걸 보라. 봉준호는 ‘반지하’라는 ‘특수’에서 ‘보편’의 미학을 뽑아낼 줄 아는 귀한 감독이다. 그렇게 ‘봉준호스러운’ 독특함이 세계성을 획득할 때 봉준호 영화는 하나의 ‘장르’가 된다.

“125년 세계 영화역사에서 (중략) 특정 장르를 대표하는 감독들은 즐비” 했으나 “감독 자체가 장르로 정해지는 감독은 없었고, 없다. 그 점에서 봉 감독은 특이함을 넘어 세계 영화사의 독보적 존재가 됐다.” 그렇다. 책 제목 그대로 봉준호는 하나의 독창적인 장르가 되어간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큰 그림이 눈앞에 그려질 것이다.

이 책은 영화작가 지망생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봉준호가 어떻게 테마를 발견하는지, 그 테마를 어떻게 숙성시키고 발전시키는지, 인물 모두에게, 설사 단역에게도 어떤 생명을 불어넣는지, 시점 변화만으로도 대사 없는 씬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등 불쑥불쑥 마주치는 봉준호의 작업노트가 참으로 즐겁다.

자신의 독자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영화보기 전에 어떠한 리뷰도 읽지 않는 (나 같은) 영화 마니아에게도 신선한 교훈을 줄 것이다. 봉준호는 인물 하나하나는 물론 인물과 사회와의 유기적 연결고리를 다 꿰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날고뛰며 사유해도 그는 우리가 가닿지 않은 가능성까지도 철저하게 다 생각해 놓고 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장악력이 정돈되고 개념적인 언사로 표현된다. 한 마디로 신의 경지인 것.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 경솔히 잘난 척 하지 말자, 교훈을 얻는다.

봉준호도 봉준호지만 “영화 보기 50년, 영화 스터디 38년, 평론 27년”인 작가한테도 묘한 질투심이 느껴진다. 전찬일은 마치 봉준호가 묘사한 마틴 스코세이지와 같다. 전찬일이 툭툭 내던지는 모든 영화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몰래 다 섭렵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평단과 대중 모두의 환영과 함께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영화작가에게도 이 책은 기분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특수에서 보편을 끌어내는 미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독창성은 지식이나 스킬이 아니라 바로 작가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것.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게 아니라 계속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누구이고, 누구일 것인가? 봉 감독조차도 미지의 최고작 ‘9번째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봉 감독에게 내밀한 욕망을 주문하고 있다. 바로 포스트 콜로니얼 텍스트. 제3국 출신의 봉준호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다. 예술가란 천상 늘 주류권력에 대항하며 마이너한 감수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거늘, 봉준호는 과연 이 주문을 받을 텐가? 역사의 거대담론으로 들어가면 그는 또 무얼 비틀고 전복할까? 전찬일 평론가의 꿈, 즉 주류담론에 대항한 반란. 과연 이루어질 텐가? 그렇다면 내 꿈은? <버닝>의 ‘종수’가 ‘벤’의 농담을 허튼소리로 전복시키는 내 꿈은?

필자 이숲 <사진 예옥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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