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칸영화제 전찬일 특별기고] 켄 로치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곡성’ 그리고 ‘살인의 추억’

켄 로치
켄 로치 <사진=위키피디아>

‘나, 다니엘 블레이크’ 황금종려상 수상···신자유주의 반대 ‘다른 세상’ 향한 희망 담아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외대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2016 칸영화제(5월 11∼22일, 현지시각 기준)가 막을 내린지 2주가 지났거늘 나는 여전히 그 자장(磁場) 안에 머물러 있다. 으레 예상 이상으로 오래 가는 시차 때문은 아니다. 아직도 다 마무리 하지 못한 칸 관련 원고 때문도 아니다. 한국 영화로는 4년만에 경쟁부문에 초청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200만명 선을, 비경쟁 섹션에 초대된 나홍진의 <곡성>이 600만명 선을 넘어 목하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올 제69회 칸 영화제가 남긴 어떤 특별한 함의 때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내포됐을 수도 있을 아주 특별한 의미!

국내 대표 종합포털 네이버 소개에 따르면 영화는, “평생을 목수로 일하다 심장이 좋지 않아 일을 할 수 없는데도 복지혜택을 위해서는 재취업 교육을 받아야 하는 노인 다니엘 블레이크의 이야기를 통해 영국 복지제도의 허점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천상 ‘살아있는 좌파영화의 전설’로 평할 수 있을 거장 켄 로치다운 소재요 주제다. 내친 김에 네이버 등을 빌려 감독에 대해 좀 더 상술해보자.

켄 로치(1936∼ )는 영화에 투신한 1960년대 초 이래 줄곧,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영국영화의 혁신을 주도했던 영화운동 ‘프리 시네마’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해왔다. 프리 시네마는 영국 특유의 사회파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 바, 초기 프리 시네마 형식을 이어받았던 감독들은 더 이상 프리 시네마의 자유로운 형식적 시도를 계승하진 않고 있지만 그 주제의식만은 지금껏 공유하고 있다.

“영국과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갈등이나 대처정부의 반(反)노동자 정책 등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 영국 노동자계급의 문제, 소외된 청년의 문제 등을 다룬 드라마 장르의 영화들은 지금도 영국영화를 대표하고 있다.”

켄 로치는 다름 아닌 그들 ‘사회파 영화’의 대표 감독. 텔리비전용 영화를 만들던 켄 로치의 존재감을 알린 연출작은 <불쌍한 암소>(1967). 이때부터 그는 영국 노동계급을 위한 영화를 전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무기력한 영국의 광산촌 노동자들을 그린 <케스>(1969)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왔을 뿐아니라 자신의 좌파적 역사관 및 이념 등을 꾸준히 설파해왔다.

북아일랜드를 무대로 모종의 살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1990년 심사위원상 수상작 <숨겨진 계략>을 위시해, 동료들과 버려진 집에서 지내는 일용직 노동자를 축으로 벌어지는 코믹 드라마 <하층민들>(1991), 두 중년 실업자의 페이소스 가득한 해프닝을 그린 <레이닝 스톤>(1993), 사회사업가들에게 아이들을 빼앗긴 한 어머니의 이야기 <레이드 버드, 레이드 버드>(199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스페인 내전을 다룬 작품인 동시에 켄 로치 감독 자신이 영국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최초의 작품이기도” 한 <랜드 앤 프리덤>(1995), 1920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자유를 향해 청춘을 바친 두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그려 감독에게 첫번째 황금종려상을 안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그리고 대공황으로 혼란에 빠진 뉴욕을 떠나 10년만에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온 지미를 축으로 전개되는 걸작 휴먼 감동드라마 <지미스 홀>(2014) 등이 그 몇몇 예다. 위에서 감독을 “살아 있는 좌파영화의 전설”로 일컬은 연유다.

문득 찾아드는 의문. 그렇다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무엇이 올 칸 경쟁 9인심사위원단을 그토록 움직여, 노거장에게 생애 두번째 최고영예를 안기게 한 것일까? 2년 전 전도연, 지아장커, 소피아 코폴라, 윌렘 대포 등 제인 캠피언을 수장으로 한 심사위원들은 여러모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 못잖은 수작 <지미스 홀>을 무관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더욱이 칸 현지에서 가장 널리 참고·인용되는 데일리 스크린 인터내셔널 11인 국제 평자들로부터 영화는 전작 <지미스 홀>보다 0.1점 낮은 종합평균 평점 2.4점(4점 만점)의 중위권 평가를 받는데 그치지 않았는가. 심지어 프랑스 <리베라시옹>의 (두) 평자로부터는 0점을 받지 않았는가. 그래서일까, 영화제 초반 선보인 영화는 최후의 순간까지 황금종려상 유력후보로는 거의 점쳐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장-피에르 & 뤽 다르넨 형제 감독의 <언노운 걸> 등과 더불어 수상을 염원하고 또 염원했지만, 큰 기대를 품진 않았다.

<나, 다니엘 브레이크>

내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그토록 강렬한 지지를 보내는 까닭은, 무엇보다 켄 로치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과 더불어 영화역사상 가장 존경·열광하는 감독이어서다. 특히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그 사회(비판)적 신념에서 그는 두 거장에 단연 앞선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영화에 유난히 더 크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은 그 반(反) 신자유주의 메시지 때문이다. 위에서도 이미 적었고, 다른 지면에서도 말했듯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 목수 일만 하다 심장병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초로의 주인공(데이브 존스 분)이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재취업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추적하면서, 영국 복지제도와 관료주의 등의 맹점을 비판한다.

영화는 그러나 그런 유의 사회 고발성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이분법적 선전선동성으로 흐르지 않고, 걸작 휴먼 드라마로 비상한다. 밑바닥 처지에 놓이게 된 ‘시민 다니엘 블레이크’가, 어느 날 자기보다 훨씬 더 열악한 처지에 처해 있는 싱글맘(해일리 스콰이어)과 그 자녀들을 발견하고는 저 세상 사람이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가족을 도우며, 그들과 함께 난국을 헤쳐나가는 극적 과정이 기대 이상의 정서적 감동과 깊은 지적 울림, 강렬한 교훈적 메시지 등을 두루 선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 네이버 소개는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린 셈이다. 아니 정확히는 영화의 진짜 메시지를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큰 사회적 층위만 볼 줄 알았지, 개인적 층위를 간과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인의 드라마를 통해 사회로 나아가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이나,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등 여느 걸작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올 칸 경쟁 심사위원들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수상식장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세상은 우리를 재앙으로 이끌 위험에 처해 있다.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취지의 소감을 피력한 노거장의 바람과 같이 않았을까? 영화 속 싱글맘 카티는 우리 네 보통사람들의 가슴 아픈 초상이며, 비록 하층민일지언정 우리가 추구·지향해야 할 삶은 다니엘의 그것이라고 그들도 공감한 건 아닐까? 비록 화려할 대로 화려한 그들의 실제 삶은 다니엘이나 카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겠지만…. 그 9인은 지난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로 건재를 과시한 호주 출신 명장 조지 밀러를 위시해, 프랑스 중견 감독 아르노 데플레셍, 이탈리아의 여배우이자 감독, 작가, 프로듀서인 발레리아 고리노, 미국의 여스타 커스턴 던스트, 덴마크 배우 마즈 미켈센, 캐나다 출신 베테랑 배우 도널드 서덜랜드, 이란의 프로듀서 카타윤 사하비, 프랑스의 인기 가수이자 배우인 바네사 파라디, 그리고 지난해 장편 데뷔작 <사울의 아들>로 칸 심사위원 대상에 이어 올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등을 거머쥐는 파란을 일으킨 헝가리 감독 라슬로 네메스였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보낸 올 칸 관련 결산 원고제목을 “칸 영화제, ‘다른 세상’에의 희망을 담다”라고 내건 월간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선택이 눈길을 끈다. 내 원고는 마침 세계적 언어학자이자 미국의 상징적 진보논객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의 신작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Who Rules the World?)의 내용 일부를 1, 2부로 나눠어 발췌했다는 1면 톱 칼럼 “미국이 저지른 폭력이 대가”나, 성일권 발행인이 쓴 “이 달의 <르 디플로> 읽기―‘한국판’ 파리8대학은 언제?” 등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켄 로치 감독의 말을 인용해보자.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줘야 하며,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로 지금 위험한 지점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거의 파국 속으로 몰아넣은 소위 신자유주의 사상에 의해 추동되는 위험한 긴축 프로젝트the dangerous project of austerity)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물론 2016 칸이 선사한 함의들은 얼마든지 더 있다. 특히 위기국면에 놓여 있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암묵적으로 보낸 세계 최고 영화제로서 칸의 연대 표명과, 그에 부응해 한국영화에 보낸 ‘가시적’ 성원―그렇다고 부산영화제를 향한 연대가 아니었다면, 올 칸에서 선보인 한국영화들이 초청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도 그렇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외의 합당하거나 비합당한 수상작들에 대한 뒷담화 등도 그 함의들로서 손색없다.

또 칸에는 경쟁 및 비경쟁 영화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주목할 만한 시선, 단편 경쟁, 시네퐁다시옹, 칸 클래식 등 여타 공식섹션 외에도 감독 주간과 비평가 주간 등 병행 섹션 이야기도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다. 이런 게 칸 영화제다. 다른 이야기들은 다른 지면, 다른 기회를 노려야 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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