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우정을 경멸하는 자? 가장 훌륭한 친구”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알랭 드 보통이 자신만의 어법으로 재구성한 독특한 형식의 ‘문학비평서’다.

알랭 드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프루스트의 편지와 메모들, 프루스트가 겪은 잡다한 사건과 사생활까지 활용해 프루스트의 작품, 혹은 프루스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 텍스트를 토대로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 ‘자신을 위한 독서법’,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 등 다방면에 걸친 실제적 교훈을 정리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닷컴에서는 이 책을 ‘문학의 탈을 쓴 자기지침서’라 평했다. 원제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1997년).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주형 옮김, 생각의 나무, 2009(초판 15쇄)

p.172
사실, 프루스트의 사교적 정중함이 과장된 것이었다는 점 때문에 모든 우정이 어느 정도는 신실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자랑스럽게 자신의 시집이나 갓난아기를 보여주는 친구들에게 듣기 좋은, 그러나 허울뿐인 말을 해주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정중함을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을 해왔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의도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한숨과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의심받을 수 있는 우리의 호감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쓰고 낳은 시와 아이들에 대해 사람들이 유별나게도 강렬한 애착을 느끼기 때문에 필요한 일이다. 남들에게 그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말과, 그들을 좋아해도 여전히 그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부정적인 생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p.173
독서에서 친교는 갑자기 그 본래적인 순수성을 회복한다. 책에는 거짓 상냥함이 없다. 우리가 이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p.175
이 접근법은 애정의 추구와 진실의 추구가 간혹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p.180
프루스트는 “우정을 경멸하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런 경멸하는 자들이 우정이라는 유대관계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길 회피하는데, 이것은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화라는 무계획적이고 두서없고 궁극적으로는 피상적인 매체의 처분에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문에 답하기보다 질문을 하는 입장에 있다고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친교를 남들을 가르치기보다 그들에 대해 배우는 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81
그들은 전투적으로 진리와 애정을 동시에 추구하기보다는 분별 있게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두 가지 목적을 분할하여, 국화와 소설을, 로르 아이망과 오데트 드 크레시를, 보내는 편지와 쓸 필요는 있지만 숨겨두는 편지를 현명하게 분리시킨다.

p.244~245
그리고 여기에 프루스트의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책들은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충분히 자각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들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감수성을 키워주고 지각능력을 길러주지만, 어떤 시점에 다다르면 그러기를 멈춘다. 이것은 우연히 그러는 것도 아니고, 가끔 그러는 것도 아니며, 운이 나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불가피하게, 정의상 그 저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그런 것이다.

p.246~247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면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그러면 진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사고의 본질적인 진보 및 우리의 진실한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준비된 꿀처럼 책갈피 사이에 놓여 있고, 도서관의 책장에서 꺼내서 보는 수고만 하면 되며, 몸과 마음이 완벽히 평온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을 보면 되는,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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