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사계절, 2011

며칠간 계속된 돈 싸움으로?극심한 스트레스를 몸이 배겨내질 못했다. 뭉친 어깨와 뒷목을 부여잡고 두통과 싸우며 이틀간 나가떨어져 있었다. 나를 짓밟았고 여전히 짓밟는 자와 연을 끊는 것이 불가능할 때,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분노와 고통이 나를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머릿속 압력을 낮추고 생각을 분산시킬 것이 필요한 순간 집어든 책.

p.131
그래서 레비나스도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연히 타자와의 관계는 공감의 관계일 수 없다. 공감은 유사한 생각과 욕망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나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관계는 책임이란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부단히 반응할 수 있고, 아이도 자신의 어머니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다. 완전한 일치도 아니고 완벽한 분리도 아닌 관계.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다. 그래서 그는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55
우리는 아이히만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아렌트가 직면한 문제였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p.171~172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불교에서도 우리의 삶이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에 내던져져 있다고 말한다. 삶 자체가 타자에 대한 폭력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의 바다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타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심지어 죽이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번뇌와 고통의 기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옷깃을 여미고 메를로 퐁티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감수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른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 즉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도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p.175
그것은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통찰이다. 결코 희망찬 메시지는 아니다.

p.181
섬세한 정신은 무의식의 층위에 머물던 미세지각들을 의식할 수 있게 된 정신을 말한다. 미세지각은 영원히 무의식의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집중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미세지각을 의식할 수 있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던 미세지각을 의식하는 순간, 누구나 섬세한 정신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지만 섬세한 정신들에는 깊이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p.208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p.213
결국 어떤 사람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시인처럼 예리한 감수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로부터 이성의 능력을 강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논리적 사유란 타자를 폭력이 아닌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p.284~285
어느 고등학교에서 인문학과 관련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 말미에 어떤 여학생이 내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잠시 숙고하다가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상이란 나는 이렇게 살아가겠다는 이념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자유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의 급류와 맞서 싸우겠다는 결연한 각오이자 다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주인으로서 살았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노예처럼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주체는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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