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문장을 고쳐쓰는 ‘손’

회복하는 인간, 오에 겐자부로 저, 서은혜 옮김, 고즈윈, 2008

오에 겐자부로의 ‘회복하는 인간’?

1994년 <만엔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집. 난해한 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하지만 이 책은 <아사히신문>에 기재했던 칼럼과 강의록을 모아 엮어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회복하는 인간>은 작가의 어린시절 추억에서부터 가족에 대한 이야기, 노년에 이른 작가의 삶의 모습과 소설가로서의 인생, 장애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의 모습 등을 담담하고도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특히 소설가로서 영향을 줬던 책,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

참고로 몇 몇 인터넷 서점에서 이 귀한 책을 반값에 판매하고 있다.

p.47
프랑스 문학과 졸업을 앞두고 상상력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던 저는 사르트르를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만, 또 한 사람 그 문장을 잊을 수 없던 이가 G.바슈라르였습니다.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일컬어지지만’, 하고 바슈라르가 썼던 부분을 프랑스어 카드로 만들어, 몇 년이 지나 나온 우사미 에이지 씨 번역의 도움을 받아가며 온전히 납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히 기본적인 이미지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바슈라르는, 문학 속에 살아 있는 신선한 낱말의 이미지가 읽는 이의 마음속에 불러오는 작용을 열거합니다. 그것들은 <감정에 희망을 주고, 인간이고자 하는 우리들의 결의에 특수한 늠름함을 부여하며, 우리들 육체적인 생명에 긴장을 불러온다. 그러한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 서적들은 문득 우리들에게 친밀한 편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구나, 그동안 나는 온갖 종류의, 하지만 한결같이 ‘친밀한 편지’를 받고 있었던 거야, 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낯선 이가 쓴 문장이건만 자신을 향해 있다고 깊이 느꼈던 건 그런 이유였어, 라고. 그리고 책이 그런 무엇이 되는 것은 상상력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p.77~79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도 있지만, 대학원을 단념한 저는 졸업식에도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4월이 되어 와타나베 선생으로부터 이야기를 하러 오라는 엽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들은 말씀을, 이미 몇 번이나 글로 썼습니다만,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쓰는 것만으론 지루하지. 어떤 작가, 시인, 사상가를 정해놓고 그 사람의 책, 그리고 그 사람에 관한 연구서를 3년 동안 계속해서 읽도록. 자네는 소설가가 될 것이니 전문 연구자가 될 필요는 없네(그렇게 될 수는 없다, 라는 의미죠). 그러니까 4년째엔 새로운 테마를 향해 나가도록 하게.’

저는 그 말씀대로 계속해 왔습니다. 올 4월부터 열다섯 번째 3년째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하여 제가 해 온 일은, 처음엔 재미로, 그러다가 사무치게 열중하여 하게 된 ‘독학’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저에게 지루해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선생님은 당시 전문기관과 무관하게 혼자서 일을 시작하게 된 한 졸업생에게 ‘독학’의 방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있어 평생의, 가장 좋은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젋은 제가 새로운 습관으로 삼았던 독서법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지식인이 되고 싶다고 바라는 ‘독학’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그렇게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치하고, 우선 그런 방향으로밖에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용에는 연결되지 않고 무언가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p.105~107
와타나베 씨가 그 한 구절을 번역하면서, 인간은 ‘이성’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생물과 다르지만 나아가 ‘손’을 갖고 있음으로써, ‘이성’과 ‘언어’에만 의지할 때 빠지게 되는 관념주의를 수정할 수 있다고 읽어 내시는 부분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고교 시절의 저는, 할 수 있다면 ‘이성’과 ‘언어’에 연관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몽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이과계 친구들에 비하면 명백히 ‘이성’은 얼치기, 수다스럽긴 하지만 ‘언어’엔 힘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관념주의에 빠질 타입이라는 것은, 글을 써 보면 금세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 불안의 씨앗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소설 작업을 해 온 지금, 썼던 문장을 고쳐 쓴다고 하는 ‘손’의 작업에,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일수록 도움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p.127
사이드의 책은, 사후 런던의 신문에 나왔고 ‘신초오(新潮)’에 번역이 실리기도 했던 논문을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일종의 (실로 독특한) 예술가의 만년의 작업이, 곧잘 이야기되는 원숙함이라든가 사회와의 조화와는 반대로, 개인으로서 끌어안고 있는 모순과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파국)의 예감으로 부대끼는 가운데 기적과도 같이 달성된다고 하는 사실을 실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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