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나는 스승으로서 잘 하고 있는 걸까?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오늘 종강을 했다. 매 학기 종강 무렵에는 스승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의심스러워진다. 랑시에르의 이 책은(번역의 문제인지 문체가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나의 수업을 여러모로 되돌아보게 한다. 책 중반부에 기술된 화가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다.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무지한 스승, 궁리, 2008

p. 34~35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스승이란 자의적인 고리 안에 지능을 가두어두는 자다. 지능은 스스로에게 필연적으로 되어야지만 그 고리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무지한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해방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기만 하면 된다. 즉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스승이 모르는 것을 홀로 배우게 될 것이다. 만일 무지한 자가 그것을 할 수 있음을 스승이 믿어주고, 또 그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현실화하도록 강제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p. 132
위대한 화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래, 나도 화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정식에는 어떤 오만도 들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거기에는 모든 이성적 존재가 지닌 힘에 대한 정당한 느낌이 들어간다. “그래, 나도 화가다!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것에는 오만이 없다. 오만은 우리나 당신들이나 화가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죽여 말하는데 있다.” 그래, 나도 화가다는,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 나에게도 나와 비슷한 자들과 소통할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p. 138~139
‘천재’, 다시 말해 해방된 예술가의 진짜 겸손이란 이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와 똑같이 알 거라고 믿는 다른 시(무언의 시)의 부재로서 그의 시를 우리에게 내놓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역량과 모든 기술을 쓴다. “우리는 스스로 라신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옳다.” 이 믿음은 어떤 광대의 자만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의 시구가 라신의 시구에 값한다거나 곧 값하게 될 것임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라신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을 알아듣는다는 것,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의 표현은 우리의 역번역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통해서 우리가 그처럼 인간임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덕분에 기호들의 자의성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는 언어의 역량을 안다. 우리가 라신과 우리의 ‘평등’이 라신이 들인 수고의 열매임을 안다. 라신의 천재성은 그가 지능의 평등이라는 원리에 따라 작업을 했고, 그가 말을 건네는 자들보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가 (길가의) 카페처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고 예상하던 사람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 우리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 역량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는 라신이 쓴 비극과 동등한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그만큼 기술을 탐구해야 하며, 언어의 자의성을 가로지르거나 우리 손으로 만드는 작품에 대한 모든 물질의 저항을 가로지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겪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이 하는 바보 만드는 교훈과 하나하나 반대되는 예술가의 해방하는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이중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에서 예술가다.

예술가는 직업인이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일을 표현수단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느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나눌 방도를 찾는다. 설명자가 불평등을 필요로 하듯, 예술가는 평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이성적 사회의 모델을 그린다. 그 사회에서는 이성에 외적인 것-물질, 언어적 기호들-에도 이성적 의지가 관통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느끼게끔 하는 의지 말이다.

p. 140
누구도 그의 이웃보다 더 많은 지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발현하는 탁월함이란 다만 다른 이가 도구를 다루는 열의만큼 고집스럽게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단어를 다루어 얻은 열매임을 알 것이다. 그들은 또 어떤 사람의 열등함이란 그로 하여금 좀 더 찾아보도록 강제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비롯된 결론임을 알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이런저런 사람이 그의 고유한 기술에 부여한 개선이란 모든 이성적 존재에 공통된 힘을 저마다 특수하게 적용한 것일 뿐임을 알 것이다.

p. 163
모든 말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과 사물들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이 시가 시 말고 다른 것인 체할 때, 시가 스스로를 진리라고 강요하고, 행위를 강제하고자 할 때 왜곡이 만들어진다. 수사학은 왜곡된 시학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사회 안에 있는 한 허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사학의 원리는 전쟁이다. 사람들은 수사학에서 이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지를 무화시킬 방법을 찾는다. 수사학이 말하는 존재의 시적인 조건에 반기를 드는 말이다. 그것은 입 다물게 하기 위해 말한다. 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할 것이다. 이상이 수사학의 강령이다.

p. 167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상가가 노동자의 지능을 무시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노동자가 농민을 무시하고, 농민이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이 이웃 여성을 무시하고 이렇게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사회의 무분별을 집약하는 정식은 우리가 우월한 열등자들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있다. 각자는 그 역설 속에서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상상하는 자에게 복종한다. 각자는 대중과 구별된다고 자처함으로써 대중의 법칙에 복종한다.

p. 194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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