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효자? 효부를 아내로 둔 남자일 뿐!”

박완서 <살아있는 날의 시작>

명절 때 만큼 부부가 남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을까. 평등한 선물, 평등한 시간, 평등한 육체노동. 산수를 이 때 만큼 잘 할 때가 없다. 많이 기울면 억울하다. 꾹꾹 참기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폭발하기도 한다. 설, 추석 후 이혼이 많은 이유일 게다. 여전히 결혼을 ‘시집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은 고달프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세계사 1993년 9월 1일 출간

p.181
그 여자가 인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 조심해요. 겉 다르고 속 다르든 간에, 거짓이든 정말이든 간에 효도를 실제로 하고 있는 건 나지 당신이 아니란 말예요. 당신뿐 아니라 모든 남자가 다 마찬가질 걸요. 어디 정말 효자가 있으면 데리고 와봐요. 효자가 있는 게 아니라 효부를 아내로 둔 남자가 있을 뿐이에요. 효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여자지 남자가 아녜요.」
그 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p.182~183
「… 저는 지금 그분한테 손톱만큼의 거짓도 없이 사람이라면 늙고 병들었을 때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거기 때문에 저는 요새 아주 편안해요. 그렇지만 이런 화평에 도달하기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당신도 알잖아요. 제일 힘들었던 건 당신이 툭하면 채찍처럼 휘두르는 효도라는 걸 극복하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놀랄 거 없어요. 당신 어머니하고 저는 남남끼리니까요.」
「입 닥치지 못할까. 어디서 남남끼리란 소리를 함부로……」
「입을 닥쳐도 그건 사실인걸요. 남의 어머니한테 효성이 우러난다는 건 거짓말이고요. 그렇지만 효도말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엔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축복스럽게도……. 남자들이 효도라는 걸로 억압하지만 않았어도 세상의 고부간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졌을걸」

p.262
말해 봤댔자 누가 감히 남의 통증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누구에게나 아픔만은 완전한 자기의 것이었다.

p.263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정하고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그 일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어렵고 부자연스러워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날은 그런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좀더 심했다. 마치 도처에 그 여자에게 그것을 강제하는 힘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그 여자는 모든 행동이 어렵고 부자연스러웠다.

p.317
헤어질까 보다,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함으로써 헤어지는 일과 헤어지는 상태를 자신이 도저히 감당 못 한다는 걸 거듭 확실히 해두려 했고 남편으로부터는 보다 따뜻한 위로와 성실한 사과를 얻어내려 했다.

p.318~319
그 때 오십대의 송 부인은 참으로 똑똑했었다. 그러나 집안의 똑똑한 어린이가 꽃이라면 너무 똑똑한 노인은 악몽이었다. 그 여자의 시어머니는 이 세상 모든 여자의 스승이 되고도 남을 만큼 똑똑했었다. 그러나 한번도 왜?라는 질문은 받지 않는 지독하게 독선적인 스승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날의 제일성(第一聲) 속에 있었다. 네가 아무리 잘나고 공부 많이 했어도 여자는 여자니라. 하다못해 오이지나 짠지를 담그는 방법까지도 그 여자가 알고 있는 방법은 부정되고 송 부인의 방법만이 옳았다. 왜 그것만이 옳은가라는 물음은 용납되지 않았다. 시집의 방법이니까 옳고, 친정의 방법이니까 그를 뿐이었다. 그때까지 그 여자가 타고나서 지니고 갈고 닦은 모든 것은 여자는 여자니라,라는 한마디로 부정되거나 무시당했다. 여자 중에서 오직 남자의 어머니만이 홀로 위대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비로소 시어머니로부터 너 이제야 내 집 사람 됐다라는 거룩한 인지의 말씀을 들었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그 여자를 길들여놓은 후 시어머니는 허구한 날 아들 내외의 잠자리 한가운데 차단기처럼 가로 누워야 편한 잠을 자는 노망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나날이었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제 반 년 남짓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오랜 세월 그런 인고를 감수한 건 여자는 여자니라,라는 여자의 운명에 대한 순종에서가 결코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만족했다면 그건 시어머니의 자유고, 그 여자 스스로는 어디까지나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사랑을 믿고 하는 희생이었기에, 그 희생은 상호적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깔고 있었다.

그 여자는 지금도 희생이라는 것에 대해 소녀처럼 아름다운 영상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상호적인 희생에 한해서였다. 일방적인 희생이란 그건 희생이라기보다는 유린이었다. 그 여자가 자기의 희생이 일방적이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힌 것처럼 소스라치게 엄습해 온 것도 무참하게 유린당했다는 느낌, 교묘하게 기만당했다는 느낌이었다.

그 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여자가 여태까지 남편과 이룩한 결혼생활이란 게 이제 그 여자 앞에서 껍질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남편 앞에선 뒷걸음질쳐 도망칠 수 있었지만 껍질을 벗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이룩해 놓은 것의 정체로부터 도망치진 못했다.

그녀가 남편과 더불어 열심히 이룩한 건 허구였을 뿐, 껍질이었을 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일종의 허탈감이 그 여자를 엄습했다. 껍질을 벗겨내고 나서 주워가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p.319
그 여자의 경우처럼 희생이 일방적이었나 상호적이었나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실상을 볼 기회가 그 여자에게 왔다는 건 그 여자의 피할 수 없는 불행이었다. 껍질 속의 허구를 본 이상 안 본 것이 될 순 없었다. 다시 껍질을 입힐 수 있을진 몰라도 다시 그걸 소중하게 떠받들 수는 없으리란 게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나 자신의 껍질도 벗으리라고 그 여자는 문득 생각했다.

p.354
그 여자는 헤어지는 일에도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의 꿈은 동등하게 헤어지는 거였다. 그 여자가 말못할 고통 끝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도 그런 고통을 거치길 바랐고, 그 여자에게 헤어지는 일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던지는 엄청난 손실을 무릅쓰는 큰일이었듯이 그에게도 그만한 부피의 상실감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등하게 헤어지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조차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 것이다.

p.358
그 드러나지 않은 부분 속엔 인철의 잘못도 그 여자의 잘못도 아닌 부부라는 관계의 본질적인 잘못이 있었다. 그 잘못은 뿌리깊고도 완강했고 미풍양속이란 견고한 갑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여자가 아내의 자리를 걸고 부닥쳐봤댔자 부서질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의 자리라는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친척들의 간섭이 자기의 앞길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호의에서 우러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귀담아 듣는 체하고 혼연대접해서 보냈지만 헤어져 살고자 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친척 여자들이 극성스럽게 인철의 잘못없음을 증언할수록 그 여자는 인철의 잘못을 용서할 수가 없어졌다. 그 여자는 대가를 치르는 일로부터 너무도 안전하게 보호된 남자의 잘못에 홀로 분개했고, 고독한 투지를 가다듬었다.

p.359
이런 일 속엔 그 여자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가정적인 행복에의 유혹이 있었다. 그런 유혹은 깜빡깜빡 오는 졸음처럼 그 여자를 감미롭게 유인하기도 하고, 깊고 깊은 수마(睡魔)처럼 그 여자를 통째로 빨아들여 흐느적흐느적 녹아들게도 했다. 그건 정말 놓치기 아까운 화평이요 행복이었다. 그걸 놓치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용서해라 용서해.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용서하면 졸음처럼 감미롭고 몽롱한 행복은 영원히 너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내부의 속삭임은 친척 여자들의 수다스러운 충고의 몇 배나 되는 설득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런 수면의 늪 같은 행복감에 자신을 완전히 용해시키지 못하고 영락없이 거기서 한 가지 사실을 건져내서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쳤다. 한 가지 사실이란 그 단잠처럼 매혹적인 무사안일은 실은 무서운 배신을 감춘 사탕발림이라는 거였다. 뒷짐진 손엔 배신과 횡포를 감추고 한 손으로 내민 사탕은 그나마 언제고 필요에 의해 회수될지도 모르는 임시적인 거란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p.362
그 여자의 앞모습과 뒷모습은 판이했다. 군살이 붙지 않은 우아하고도 간결한 선과 자신 있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하여 뒤에서 본 그 여자는 스무 살을 갓 넘어선 것처럼 싱싱해 보였다. 그러나 그 여자의 앞모습엔 분명하고도 멀지 않은 노추의 예감이 저녁놀처럼 서려 있었다.
판이한 건 그 여자의 앞과 뒤뿐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판이해서 그 여자는 자주 실소했다.

p.363
이윽고 그 여자는 손바닥으로 천천히 볼의 눈물을 닦았다. 아직도 눈물어린 눈에 손바닥에 끈적한 눈물이 핏빛으로 번져 보였다. 그 여자가 집 나오는 것과 동시에 벗은 부덕(婦德)이란 탈은 여자가 조상대대로 써내려오는 동안 거의 육화된 거기 때문에 그렇게 피흘리지 않고는 벗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싱싱한 상처에서 피가 번져나듯 그 여자의 얼굴에선 계속해서 눈물이 번졌다.

<해설> 영원한 농담에서 새로운 진담으로 _김미현

p.369
그녀의 겉과 속이 다른 이유는 그녀가 처한 상황의 복합성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가면>을 쓴 채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여자답다는 건 나에겐 연기야>(215쪽)라고. 이 말은 그녀의 속마음은 여자답지 않은데, 겉으로는 여자다운 척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두 개의 자아>, <또 다른 나>, <내속의 나>가 있게 된다. 이 소설이 의지와 투지를 앞세운 장렬한 <무용담>이 아니라 분열된 자의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여성의 자기방어적인 처절한 <인고담>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가. 왜 그녀는 여자답게 행동하려 애쓰는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사회나 남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여성다움이고, 그것을 내면화했을 때 훨씬 대접받고 갈등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이 없다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녀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귀기울이지 않는다. 갈등보다 화합을 중시하므로 자신에게 정직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두려움 없이 정직할 수는 없으니까.

p.371~372
이런 청희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양상들을 볼 때 그녀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은 자신의 바닥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남편보다 그런 남편을 극복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일 수 있다. 이럴 때 그녀의 싸움은 <남편>이라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기자신 속의 <비주제적인 자아>라는 <내부의 적>을 상대로 하게 된다. 남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거나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더 힘든지를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처절한 싸움을 통해 작가는 청희의 여성의식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 그토록 견고함을 나타내려 한 것일 수 있다. 이 때 여성이 처한 심리적 리얼리티는 더욱 확보된다. 그리고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은 선험적인 주장이 아니라 일상적인 경험에서 직접 부딪치게 되는 갈등과 선택의 문제임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p.372
그러나 박완서는 『살아있는 날의 시작』에서 어떻게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피지배자라는 <계급>과 통하는지를 지적한다. <남성이 부르주아지라면 그의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라는 엥겔스의 말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p.376~377
청희의 시어머니도 <네가 아무리 잘나고 공부 많이 했어도 여자는 여자니라>(318쪽)는 말로 며느리의 기를 죽인다. 한편 아들인 인철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남존여비적인 사고를 주입시킨다. <사내는 우월하고 계집애는 열등하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용되는 옳고 그름과 남자와 여자 사이에 통용되는 옳고 그름이 따로 있다>(145쪽)는 사실을 강조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남자는 가해자여야 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147쪽)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시키는 어머니들은 딸이 피해자가 될까 봐는 걱정하면서 아들이 가해자가 될까 봐 걱정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권력을 누리게 해주는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당당할 수 있었던 시어머니를 거꾸로 반영하는 것이 청희의 친정어머니이다. 아들들에게 버림받고 병든 몸을 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친정어머니는 사위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딸하고 사는 걸 늘그막의 최악의 망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친정어머니의 모습은 입장만 바뀌었다 뿐 아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어머니와 동일하다. 어머니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런 <아들가진 세도>를 꺾는 것이 <구식여자한테서 정조를 빼앗는 것만큼이나 큰 모독>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379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살아있는 일 자체보다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소설화하는 것은 어렵다. 박완서는 <살아있는 날의 시작>이 <죽어있던 날>과의 끝과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됨을 잘 아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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