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영감은 지식과 아무 상관없는데···”
키스 존스톤 <즉흥연기>
요즘 작업이 좀 막히기도 하고, 글 쓰면서 참고할 것도 있어서 다시 꺼내서 읽고 있는 책.
무의식적으로 작업하면서, 육아하면서 사용하는 방법들이 ‘비망록’ 챕터에서 문장 형태로 정확히 쓰여 있어서 다시 읽으면서도 새삼 놀라고 있다. 밑줄 그은 부분은 2001년도에 처음 읽으면서 표시해두었었던 부분들. 오래 전에 밑줄쳐 놓고도 이렇게 새삼스러워하다니 이놈의 기억력.
내친김에 구석에 적어놓았던 메모도 옮겨본다. ‘완벽에의 욕구’에 가득찬 사람들의 강요를 감당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나를 평가하는 그들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평가하는 짓은 그만두고(시선을 차단해!) 마음을 고요히 유지하자.
예나 지금이나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이지만, 전에 비해 많이 편안해졌다. 어느 정도 괴로운 관계들에 물리적 거리를 두게 된 것도 있겠지만, 작업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를 비추어 단련한 시간이 그만큼 쌓인 것이겠지… 다시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책.
p.14
내가 이렇게 변화무쌍한 시각의 세계를 재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모든 재능을 상실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샅샅이 찾아내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나는 최면 이미지-많은 사람이 잠의 문턱에서 떠올리는 그림들-로 시작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예측할 수 있는 장면으로 이어진 경우가 없다는 점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그 이미지들이 즉흥적이고 돌발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최면 이미지를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가 보여서 “저거다!”하는 순간 슬며시 잠이 깨 버리면 그 때 이미 그 이미지는 사라져 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그 이미지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숲 속에 잠복한 사냥꾼처럼 “마음을 고요히 유지하는”법을 익혔다.
p.16
불러낸 이미지에 몰입하는 연습을 수없이 거듭한 뒤에야 내 주변에서 현실에 몰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생기 없고 침울한 상태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시 어떤 환영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런 것은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 내 주위에 존재하던 일체의 생명감이 파괴된 주된 이유는 내가 예술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는 법을 배웠고, 균형 잡는 법을 배웠고, 글쓰기를 배웠다. 모든 것을 재구성하는 법을 배워 내가 그래야 한다고 믿는 대로 모양을 고쳐 놓곤 했다. 물론 그것은 실제 모습보다 훨씬 못한 그런 모양이었지만. 둔함은 나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교육에서 오는 것이었다.
p.22
나는 영감은 지식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결국 나는 그 어느 것도 시도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처음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같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수정되고 정렬되어야 했다.
p.23
나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미친 짓임을,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 농부들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도 있음을, 춤추는 그 남자가 나-글에 갇힌, 춤출 줄 모르는-보다 뛰어난 사람일 수 있음을 한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 대다수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보게 되었으며, 또한 그 때부터 사람들을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p.39
영감이 떠오르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뭔가를 바로잡겠다고 들면 대실패로 끝나곤 한다.
p.40
우리는 얼떨결에 만들어지는 것들이 고심하여 매달린 작품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론에서 나온 생각치고 기발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토론하는 시간 대부분이 당면한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지위 문제 따위에 할애된다.
p.45
그 뒤로는 연극을 연출할 때면 언제나 연출 방식 따위는 잊고서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상식을 기반으로 가능한 가장 명백한 해결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할 따름이다.
p.50
나는 공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진전이 거의 없는 학생들을 그 자리에서 중단시키고 맨 첫단계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썼다. 우리는 사람들을 재능 없다고 보는 대신에 그들이 공포증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렇게 하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그 자리에서 일변하기도 한다.
존 홀트의 <어린이는 어떻게 실패하는가 How Children Fail>(1969)는 어린이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는 학생들에게 문제-그것이 얼마나 쉬운 문제이건 간에-와 씨름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책략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주었고, 그런 식으로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 주게 되면 때로 놀라운 효과가 나타난다. 대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으며 심지어 데굴데굴 구르는 학생도 있었다.
p.51~53
많은 학생이 즉흥연기나 하나의 장면을 상당히 힘없이 시작한다. 마치 어디가 병이 들어 활기라고는 없는 모습들이다. 이들은 동정심을 구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 문제가 제아무리 쉬운 것이라고 해도 이들은 자기는 부족하다는 표정의 낡은 속임수를 그대로 사용한다. 이 책략은 그들이 “실패”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하게 만들며, “성공”하면 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풀 죽은 태도로는 실패가 거의 확실하며, 모든 사람이 그 사람한테 넌더리를 내고 만다.
어렸을 때는 통했을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그런 태도를 취하면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리고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비생산적인지를 알고 나면 “아파”보이던 학생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건강”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 집단 전체의 분위기 또한 그 자리에서 바뀔 것이다.
또 하나의 흔한 책략은 문제를 예상하고 미리 해답을 준비하는 경우이다. (거의 모든 학생이 이것을 한다. 아마도 읽기를 배울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느 단락이 자기 차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해서 미리 그것을 풀려고 기를 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불리함이 있다. 첫째, 다른 학생들의 시도로부터 배울 기회를 놓치게 되며 둘째, 계산을 잘못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 그 근처 다른 단락을 읽으라는 요구라도 받는 날이면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만다.)
대부분의 학생은 그런 기술이 얼마나 비능률적인지 (내가 설명해 줄 때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사가 그러한 일들에 흥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안타깝게도 상당히 진기한 축에 들어간다. 나는 또한 맨 뒷줄에 앉는 전략이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얼마나 고립시키는가, “초연”하고 “객관적”인 “평론쟁이”적 자세가 어떻게 몰입을 방지하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실패로 인한 비난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될 수 있는 한 빠른 속도로 배우려면 직접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해 보라고 주문했다. 나는 즉흥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미래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이기려고” 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머릿속을 텅 비우고 그저 지켜 보기만 하라고. 자기 차례가 되면 지시받은 대로만 하면서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기 안의 즉흥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앞으로의 일을 통제하려 들지 않겠다는 이 결심으로 결정난다.
내가 세 살배가 아들과 놀다가 한 대 찰싹 때리면 아들은 내 표정에서 따뜻함이냐 통증이냐를 결정할 신호를 읽는다. 조용히, 천천히 때리는 동작은 ‘심각’하게 받아들여 아파하면서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세게, ‘장난’ 분위기로 때리게 되면 아이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하고 계속 놀고 싶으면 나를 자기 놀이 속에다가 집어넣고 싶은 마음에 ‘장난이에요’ 신호를 보낸다.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서로서로 연관이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나는 장난치고 있다’는 신호 보내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일은 끊임없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