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 플라자] 정직성 작가 12회 개인전


26일 유진갤러리서 새 작품 30여 점 선보여

정직성 작가가 ‘어떤조건’이란 주제로 4월26일~5월25일 서울 청담동 유진갤러리에서?12회 개인전을 연다.

이번?전시는 새 작업실을 구해야 했던 작가의 개인적 상황에서 출발했다.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부동산을 전전하며 목격한 건물과 방들의 구조가 이번 신작의 소재다.

유진갤러리는 “보증금 500만원과 월세 30만원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공간들이 갖는 공통적, 개별적 특징들을 예민한 감각으로 채취해 추상화한 드로잉과 유화 30여 점은 도시의 거대하고 개방적 단면들을 시원스럽게 드러냈던 전작들과 비교해 ‘방’이라는 도시의 폐쇄적인 구조들을 작가가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관람시간은 오전 11~오후 6시. 일요일 휴무. (문의 : 542-4964)

작가노트?

“내가 유진갤러리를 처음 방문했던 것은 친구가 이곳의 개관과 더불어 큐레이터로 일하게 되면서 였다. 갤러리 대표님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는 이 곳은 척 보기에도 매우 사랑받은 집이었던 것 같았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마당과 바람결에 간간이 들려오는 풍경소리, 공들여 조각한 듯 보이는 문과 단정한 모양의 창문. 만약 계급에 따른 취향이 있다면, 과시하지 않는 상류층의 집에 대한 취향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이상적인 주택이었다. 나는 별 일이 없어도 가끔 갤러리에 들러 마당에 가만히 앉아 슬슬 부는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얻어 마시곤 했다.

이곳에서 전시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마침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학교 앞 머물던 원룸에서 이사하려던 참이었다. 9평되는 방 자체엔 별 불만이 없었으나 복도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보던 방에 거주하시는 거친 아저씨가 무서웠던 나는 이사를 감행했는데, 집과 작업실을 번갈아 이사 다녀야만 하는 처지가 무척 심란했다. 전시보다 레지던시 안하시나요? 내가 갤러리 대표님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던졌던 말이었다.

작업실로 쓰던 미술관 레지던시 계약 만료가 전시 오픈시기와 맞물려 있었기에 작업실로 쓸만한 공간을 보러 다니면서 이번 전시를 준비해야 했다. 페인팅을 하는 작가인 나는 짐이 많아 꽤 큰 공간이 필요했지만 보유한 돈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적절한 공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술관련 사이트에 올라오는 스튜디오 정보는 물론, 부동산 관련 인터넷 까페를 수시로 드나들며 정보를 체크하고 장소를 방문했다. 평수가 원하는 크기에 맞는다 하더라도 대형 페인팅 작업을 하는 나에게는 그림이 잘 들고 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으므로 문의 크기, 계단의 폭, 층고 등이 핵심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그런 조건이 별로 중요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 사이트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조건이 거의 표기돼 있지 않아서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돈으로 서울시내에 적당한 작업실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경기도 일대의 지하 공간 혹은 불법창고 정도가 가능해 보였다.

하루는 파주에 있는 후보지 서너 군데를 돌아보러 길을 나섰는데, 2월의 이른 봄비가 내려 파주일대에 안개가 자욱했다. 운전하기에 앞이 잘 안 보여 더듬더듬 돌아다니던 나는 문득 대학 다닐 때 읽었던 책의 한 구절,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라는 문구가 생각났다. 파주에 작업실이 있는 친구에게 들러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면서도 계속 그 문구에 사로잡혔는데, 도대체 어디서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책장을 뒤지다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에 인용돼 있던 한 소설(<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의 일부에서 그 구절을 다시 만났다.

청담동의 이상적인 주택이었던 갤러리에, 500/30을 들고 작업실을 찾아다니던 나의 그림을 건다. 이 그림들은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일 터이다. 나는 아직 적절한 작업실을 찾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레지던시로 머물던 미술관에서 계약기간을 다섯 달 연장해 주었다. 나는 또 어디로 가게 될까. 잘 모르겠다.” <정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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