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이 읽고 밑줄 긋다] 쿨하게 한걸음
75년생 작가가, 서른 네 살에 33세 작중화자이자 주인공을 내세워 쓴 소설. 너무 구체적이고 생생한 인물캐릭터들이 내 주변 친구, 가족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한다.
서른?세 살 때 난 왜 이토록 질풍노도 사춘기인가, 원래 사춘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건가 아님 사춘기는 비정규직의 특성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와 너무나 비슷한 소설 속 서른셋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공감의 ‘썩소’를 날렸다는.
너무나 구체적인 캐릭터들 때문인지, 소설로서의 강한 매력이 느껴지기보다는 주변인들의 블로그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 강한 게 이 소설의 강점이자 단점. 어쨌든 매우 공감하며 두시간만에 독파.
p.252 본문 중
“서른 세 살이 되고 보니 서른 세 살이라는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없거나, 있었는데 모호해졌거나 없었는데 생겼거나, 행복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혼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재의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나의 서른셋 이후는 과연 어떤 풍경이 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p.265~267 작가인터뷰 중
-작중화자의 나이가 서른 세 살로 설정되어 있다. 서른 세 살은 예수가 지상의 삶에 못 박힌 시점이고 실제 통계적으로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나이이기도 한데, 주인공들의 나이를 서른세살로 설정한 의도가 있는가.
“큰 의도는 없었다. 처음에는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서른셋, 넷이 돼도 방향을 못 잡아 갈팡질팡하거나 더 늦기 전에 선회를 시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과거에 비해 사회진출이나 결혼, 출산이 늦어지면서 요즘은 철이 드는 시기도 덩달아 늦어지고 그래서 이십대와 삼십대로 가르는 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서른 살의 강은 어쩌면 서른 살이 지난 후에, 그러니까 중반쯤에나 건너게 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화자를 서른셋으로 설정했다. ”
-발표한 두 편의 장편을 읽다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젊은 여성이 겪는 물질적 결핍의 두려움에 관한 묘사가 유독 탁월하다. 이런 심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미혼의, 게다가 애인도 없고 실업자이며 은행잔고마저 넉넉지 않은 여성이 바라보는 자본주의사회란 두려움 그 자체다. 돛단배를 타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가진 것도 없고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경험조차 없으니 풍문만으로도 두려워지고 자꾸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게 된다. 그 막막함과 상대적 빈곤감 같은 걸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