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유월엔 애틋한 사연이 있다
유월이 오고 있다. 9년 전 일이다. 현충원 참배 후 분수 곁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친구의 아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갓 제대한 젊은이였다. 순직한 군대 동기 성묘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아, 이 평시에도 젊음이 스러져 가는구나! 문득 유월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새파랗고 태양도 작렬한다. 왜 이렇게 새파란 하늘이, 뜨거운 태양이 핏빛 같은 서러움으로 다가오는가! 죽은 선열의 넋이 찾아 들어서다.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땅덩어리를 지켜내기 위한 숱한 죽음이 있었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동족상잔의 비극도 있었다. 상처는 실향민의 눈물 마른 한과, 기나 긴 38선이 말해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이 칼 들고 총 들어 저항하다 죽어간 사람만은 아니다. 제 자리에서 제 직분을 묵묵히 해내다가 생을 마친 사람들의 몫이 훨씬 더 많다. 산과 들, 그리고 강가 여기저기에 누워 있거나 뿌려진 민초가 그들이다.
민초의 삶이라 하여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변함없이 살아나가는 민초야말로 사회와 나라의 굳건한 바탕이자 버팀목이다. 할 말이야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그저 참아내는 민초가, 서민이 있기에 우리들 삶터의 모양새가 지탱되고 발전해 나간다 할 것이다. 말없는 다수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호국이 비로소 가능하다. 입으로 애국애족을 외치는 자는 뒤로 빠지기 일쑤이다. 내 몸, 내 일가친척 건사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산하를 붉게 물들이며 산화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했다. 공허한 말을 멀리한 채 남보다 앞장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몸을 던졌다.
사사로운 이익이나 이름 팔기를 떠나 나라와 민족 위해 내 한 목숨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리저리 재다가는 행동할 수 없다. 충정 하나로 우직하게 실행하여 몸을 바친다.
유월에는 그렇게 삶을 살다 간 넋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숨결, 손길, 발자국이 선명한 곳으로 찾아간다. 비록 매년 한번 이때 우리가 모신다 하더라도 흔쾌히 부모님에게로, 형제자매에게로, 집사람에게로, 아들딸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유월은 간다. 유월이 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칠월이 들어선다. 빈틈없는 자연계의 운행이다. 이 틀 속에서 우리도 살아간다.
산 자는 산 자의 삶을 산다. 죽은 사람이 산 자를 위해 희생했듯이 산 자는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산다.
순국하신 분들과 똑같은 삶은 살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 뜻 이어가게 만들고는 유월은 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칠월이 들어선다.
내년에도 우리는 그곳에서 뜻을 기리고 다짐할 것이다. 한밤을 달려 새벽에 도착한 할머니의 하염없는 눈물을 또 볼 것이다. 그때 우리는 또 다시 한번을 다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