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신춘예찬, “정 듬뿍 있어 봄이 좋더라!”

점심하기로 한 날,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한다. 행여 무슨 일 생길까 걱정했단다. 약속장소가 지척인데도 늦을까 미리 나섰단다. 그 양반 만나기로 해서 그랬단다.

그런 편지 받고 나서 하긴 나도 그랬다고 답했다. 그 누구 만나기로 하면 나도 새벽부터 바쁘다. 설렘이 내내 나를 감싼다. 서두른다. 사람 마음 똑같다고 보냈다.

만나면 말 아끼리라 다지고 다진다. 듣기를 더 하리라 결심한다. 가면서 몇 번이고 나에게 주의를 준다. 정작 자리에 앉으면 영 딴판. 끝내 말 많아지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 후회막심. 어이해 또 그랬는고. 그저 그냥 그리 되었나. 감싸주리라 믿는 마음 바탕에 깔려서인가. 그렇다. 그는 나를 좋아하고, 나는 그를 좋아하기에 그리 된다.

삶이란 결여의 충족과정. 서로 부족함 채워주기 아니겠는가. 인간관계란 그래서 결점과의 교제다. 흠은 되도록 눈감아준다. 장점만은 어떻게든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살다 보면 싹트는 마음. 둘 사이에 쌓이는 정이다. 정이 있어 넘어져도 일어선다. 상처를 입어도 예전처럼 다시 걷는다. 그러기에 정이란 좌절을 치유한다. 희망을 일군다.

세상살이는 네가 있거나 네가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지금 네가 있으면 너와 나는 무언가 귀중한 실체다. 만약 네가 없다면 빈 공간만 남는다. 둘 사이를 잇는 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희구한다. 가족의 정에 보답하리라 한다. 친구의 정에 부응하리라 한다. 주변 사람들의 정에 보답하리라 한다. 진심과 정성으로 대하리라 한다. 그런 정 많은 하루를 작심한다.

꿈꾸며 사는 우리. 아침에 희망 쥐고 집 나선다. 저녁에 그 끝자락 잡고 들어간다. 어느 누군들 흡족하게 쥐고 가는가. 그저 이만큼에서 오늘은 됐다는 생각으로 귀가하곤 한다.

다 정 탓이다. 버리지 못하는 정 덕분이다. 낮에 돌아다니다가도 저녁엔 돌아간다. 지친 몸 식구들 속에 섞으면 안온해서다. 그게 바로 정이다. 그 정으로 산다.

얼마 전 충남 아산에 갔다. 그 친구 보고픔에 터지려는 가슴. 그로 인해 너무 일찍 길 떠났다. 한 시간이나 남게 도착. 어디서 커피라도 마시며 기다려야 했다. 그럴 곳이 없었다.

혹시나 하며 문구점에 들어갔다. 커피 자판기 있냐고 물었다. 없다면서 의외의 말을 했다. 제가 한잔 대접해 드리겠다는 거였다. 고마움에 천천히 마셨다. 맛있게 드신다 했다.

그대로 나오기가 불편했다. 초등학교 앞의 평범한 점포. 어린 학생들에게나 필요한 학용품만 즐비한 진열대. 마침 스티커가 눈에 들어 왔다. 몇 천원어치 샀다. 맘 편했다.

이 또한 정. 고마움에 화답하는 인지상정이 바로 정. 그날 내내 기분 좋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학자가 그랬다. “단골은 가격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발길을 잡아 이끄는가. 사람이란다. 주인의 포근함이 빚어내는 편안한 분위기란다. 이는 무얼 말하는가. 역시 정. 정이다. 사람살이에 정이란 필수품이다.

봄이 오고 있다. 살기 어려운 사람에게 추위는 고역이다. 손발의 시림과 마음의 아픔을 안긴다. 상실감 속에서 허덕인다. 당신의 따뜻한 손이 이럴 때도 역시 힘이 된다. 봄은 정을 싣고 오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늘 굶주린다. 오늘도 저녁을 거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매일 굶주린 배 움켜쥐고 잠자리에 드는 지구촌 인류는 물경 8억명. 우리의 온정을 기다린다.

소유는 욕망을 재생산한다. 늘 허기지게 만든다. 다 채웠다 싶으면 이내 빠져나가서다. 재산싸움에 휩싸인다. 병이 든다. 인심 쓰기 정 나누기에 인색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지난 한 해 결산 성적표는 ‘해피’다. 그대 내 곁에 있었다. 동행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아픔이고 기쁨인 정으로 행복했었다고 그대에게 전한다.

그리고 당신 모습 눈에 밟히면 그냥 놔두지 않으련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련다. 곁에 가서 외치겠다. 어서 나와. 빨리 와. 함께 가자고 소리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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