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칼럼] 인도 사회에서 ‘영원한 선’이란…
영화 ‘가문의 법칙(Sarkar Raj)’ 통해 인도 사회 읽기
4월 12일 한 공중파 방송을 통해 <가문의 법칙(Sarkar Raj)>이 방영됐다.? 인도에서 2008년 개봉된 이 영화는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한국어 번역명은 아마도 국내 코미디 영화 <가문의 영광> 시리즈물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일부 수긍되는 점은 물론 있다. 인도 영화 <가문의 법칙>도 조폭 영화라면 조폭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케일의 차이가 너무 커서 왜 이렇게 번역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문의 영광>은 조폭 가문에 검사 며느리가 시집오는 에피소드를 통해서 정치와 조폭의 관계를 희화화하는 코미디 영화지만 <가문의 법칙>은 아예 정치 마피아가문의 우두머리 사르카르가 어떻게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반영하고 있다. <가문의 법칙>에 영향을 주었다는 영화 <대부>의 이태리 마피아들도 어둠의 세계의 지배권을 지배하는 수준이지 <가문의 법칙>처럼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수준은 아니다.?단어 라자(raj)의 의미인 ‘왕국’ ‘체제’ ‘통치’를 살려서 ‘사르카르의 지배’로 번역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이 영화를 통해서 인도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을 두 가지만 같이 짚어보자.
영화를 보면서 첫 번째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인도에서 가족의 의미다. 인도인들에게 가족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한국기업들이 인도에 진출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나온 ‘인도 노무관리지침서’나 비즈니스 관련 서적들을 보면 인도인들의 가족행사에 참가해 외부인이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라는 조언이 들어 있다.? 이런 조언이 경영의 일반적인 조언으로 적힌 것들은 잘못이지만 직원들이 얼마 안 되거나 거래규모가 작은 소기업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 영화 속 세상과 영화 밖 세상은 동일한 세상으로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이다. 영화 밖 세상에서 정치인들은 네루 가문에서 보다시피 손자에게까지 그 권력을 물려주려 하고 있고 인도의 부자들도 대부분 부는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불려가는 것이다. 영화 속 세상도 차이가 없다.
이 영화의 처음 시작은 저명한 정치 지도자인 사르카르가 군중집회에서 자기 아들인 샹카르가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룩했는가를 강조한 후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을 공개적으로 지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이 영화의 끝은 사르카르 가문의 후계자인 샹카르를 교묘하게 살해한 후 자기 손자를 차기 정치 지도자로 세워 자신의 가문을 세우려고 했던 자칭 간디주의자 라오에 대한 사르카르의 복수로 끝이 난다.
영화속 남여주인공 실제 부부, 계층 달라?어렵게 결혼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영화 밖에서 실제로 가족이다. 정치 마피아의 수장으로 나오는 사르카르역의 아미타브 밧찬은 영화에서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아들 샹카르역의 아비쉑 밧찬의 아버지이고 다국적 기업의 후계자인 아니타 라잔 역의 아이쉬와라 라이는 아비쉑 밧찬의 아내이다. 이 볼리우드 정치 영화 밖에서 일어나는 볼리우드 정치도 심각하다.
아이쉬와라 라이는 번트 커뮤니티인(Bunt) 출신으로 이 커뮤니티는 후진 카스트로 분류된다. 암베드카르 이후 달리트(불가촉천민)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고 가장 많이 구독되는 달리트 저널인 달리트 보이스(Dalit voice)의 편집인인 라자쉐카르(V. T. Rajshekar) 또한 번트 커뮤니티이다. 아이쉬와라 라이가 브라만 카스트인 밧찬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달리트들은 반대했다.
상층 카스트가 지배하는 볼리우드 영화계의 위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잠깐 아이쉬와라 라이와 염문이 돌았던 이슬람인 살만 칸과 결혼하기를 바랐을 정도이다. 인도의 상업영화계를 지배하고 있는 밧찬 집안이 아이쉬와라 라이에게 결혼을 위해 요구한 것은 결혼 전 바나나 나무와 먼저 결혼하는 것이었다. 아이쉬와라 라이가 가진 액운을 아이쉬와라 라이의 남편이 될 바나나 나무가 모두 받아서 아비쉑 밧찬에게 액운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문맹인 나라, 그 때문에 정치인들보다 배우들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더 크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나라인 인도에서 이 최고의 스타 가족들의 가족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이런 미신적 행위는 인도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후진적 사회의식을 온존시키는 것이다.?대다수 인도인들의 ‘신앙심(?)’은 ‘가문의 영광’과 떼려야 뗄 수도 없다. 밧찬 집안은 가문 외부에서의 비판과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이쉬와라 라이와 바나나 나무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지도계층에 속하는 자기 가문의 영광이지 가문의 외부인들이 논하는 인도 사회의 후진성 극복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인도인들에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도 신화에서의 선과 악의 개념이다. 인도에서 생산된 거의 모든 문화생산물들은 인도 신화와 관련이 있다. 가장 중요한 두 텍스트는 국내에서도 번역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이다. <마하바라타>에서도 전쟁을 시작하기 전 크리슈나와 아르주나가 나누는 대화를 담은 <바가바드 기타>는 <마하바라타>와는 별도로 따로 떼어내어 널리 읽히고 있고 국내에서도 여러 번역판본이 있다.
<가문의 법칙>과 관련된 신화는 <마하바라타>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고빈다(Govinda)를 외치는 테마송이 계속 흘러나온다. 고빈다는 크리슈나 신의 다른 이름이다. 고빈다 즉 크리슈나 신을 부르는 것은 전쟁에서 이길 것을 염원하는 것이다. 사르카르 마피아들이 발전소 건설 예정지역으로 자동차로 떼를 지어 이동할 때, ‘고빈다’ ‘고빈다’라고 크리슈나신을 부르는 테마 음악이 흘러나오면? 인도인들은 크리슈나 신이 모는 전차를 타고 전장지로 싸우러 가는 아루주나의 전차부대를 연상하는 것이다. 사르카르 마피아가 그들의 적들을 살해할 때도 이 테마송은 반복되어 흘러 나온다.
바가바드 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하며 전사계급인 아르주나와 그를 지지하는 크리슈나신의 이야기이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 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이 바가바드기타의 배경이다.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디슈트라가 카우라바 형제들 가운데 맏형 두료다나와 도박을?해 그 결과로 그는 왕국을 잃고 네 형제들과 함께 13년 동안 숲속에 유배됐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됐고 전쟁이 시작됐다.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 아르주나가 형제들과 싸워야 하는 전쟁에 대해서 회의하자 그의 친구이자 전차병이자 비슈누 신의 아바타인 크리슈나는 싸우러 나가야 한다고 아르주나에게 말을 한다.
경제 개발, 주민땅 지키기, 무엇이?선인가?
도대체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식민지 시절 간디가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가지기 이전 전투적인 힌두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틸락은 바가바드 기타의 인용을 통해서 영국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았다.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바가바드 기타와 마하바라타 서사시가 ‘선과 악의 위대한 투쟁’을 그렸다고 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에게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들어보자.
“마야(maya)는 있는 그대로의 물질세계 현상의 인식을 의미한다. 즉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서 우리의 경험이라는 기반은 모순적이다. 심오한 모순들을 통해 모든 곳에서 전개되는 발전이다. 이는 선이 있는 곳에 악도 같이 있다는 것이다. 그 반대도 또한 성립한다. 악이 있는 곳에는 선 또한 존재해야 한다. 삶이 있는 곳에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기뻐하는 이들 모두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고 고통이 있는 곳에서도 기쁨은 있다. 사람들은 가끔 언제나 선만 있고 악은 없는, 언제나 우리가 즐겁고 슬픔이라고는 없는 모순들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의 본질상 이것은 불가능하다.”
비베카난다는 위와 같이 선과 악을 절대적으로 긋는 태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는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사고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회에 대해서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어떤 단계에서는 사회는 좋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이상이 아니며 사회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진리의 척도로 삼는 것은 너무나도 비논리적이다. ‘우리는 잘 판단할 수도 있다.’”
비베카난다는 19세기 말 영국의 수탈로 인한 인위적인 기근으로 백골들이 허옇게 쌓여가던 식민지 시대를 살았다.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양분화 하는 것에 반대했던 비베카난다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의 선과 악에 대해 판단을 어떻게 하고 행동할 것인가는 직접 보여줬다.
지주들이 박애활동이 주를 이루는 그의 종교 활동을 후원을 하고 자신을 축복해주기 바라더라도 조금도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악행인 소작인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그의 스승인 라마크리쉬나에서부터 시작된 가르침이었다. 라마크리쉬나가 비베카난다등의 제자에게 가르친 것은 인간을 섬기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자신과 함께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 지주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굶주린 이들 사이에 앉아서 버텼기에 그 지주는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밖에 없었다. 라마크리쉬나는 흉년이 들던 해에는 소작료를 낼 수 없었던 소작인들을 위해서 올해는 소작료를 받지 말라고 지주에게 권하고 이를 관철시켜서 소작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었다. 위와 같이 비베카난다가 선과 악을 나누지 말라고 한 것은 사회는 계속 바뀌는 것이기에 고정된 기준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나누지 말라는 의미이지 선과 악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또 선과 악에 대해서 판단이 서게 되면 라마크리쉬나와 비베카난다가 보여준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인도 사회의 부패에 대해서 인도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계속 바뀌어가는 사회에서의 선과 악의 판단은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선’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사르카르 마피아의 ‘발전소 건설을 통해 경제 개발을 이루자’(산업 개발)와 라오의 손자인 솜지의 ‘주민들의 땅을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지키자’(주민 보호)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둘 다 선도 악도 아니기에 새로운 선인 ‘품격 있는 발전’을 찾아야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 양자 사이에서 새로운 ‘지금 이 시대의 선’이 무엇인가는 드러나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를 악으로만 규정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남은 것은 사르카르 마피아와 라오 마피아의 간의 ‘가문의 영광을 위한 전쟁으로 피로 얼룩져 있는 여전히 낙후되고 부패한 인도 사회일 뿐이었다. 계속 바뀌어가는 사회에서 ’지금 시대의 선과 악’을 판단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영원한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쉽다. ‘영원한 선’은 무엇이 있을까? ‘가문의 영광’이 ‘영원한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피아 <가문의 법칙>이 아닐까? <정호영 자다푸르 대학 사회학 박사 과정>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