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 칼럼] ‘마드라스 카페’ 통해 본 인도의 남아시아 외교
타밀 타이커스와 라자브 간디 암살 모티브로 영화화
발리우드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존 아브라함(John Abraham)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마드라스 카페(Madras Cafe)>가 지난 8월 개봉됐다. 1억루피(20억원, 1루피=20원)의 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 첫 주에 3억3810만루피(한화 67억6200만원)를 벌어들이면서 손익분기점을 바로 넘어섰고, 스타 중심의 오락물인 발리우드 영화의 일반적인 경로를 걸었다.
다만 여타 발리우드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타밀인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영화제작사가 타밀어 더빙으로 제작한 것은 분명히 타밀인들을 주요 관객층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텐데 왜 주 관객층인 타밀인들의 분노를 산 것일까? 또한 일부 정치인들은 왜 다른 정치 스릴러물에는 눈길을 주지도 않다가? 유독 이 영화에는 상영 금지까지 하겠다고 분노하는 것일까?
이 영화는 스리랑카의 타밀 타이거스와 라지브 간디의 암살이라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소재를 이용한 스파이 스릴러물이다. 사실 발리우드에서 이런 류의 소재로 주로 이용되는 것은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의 까쉬미르 분쟁이다. 파키스탄이나 까쉬미르 소재의 발리우드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별 무리 없이 개봉된 것에 비해서 스리랑카와 타밀 타이거스를 다룬 영화는 검열 후 개봉이 되지 않거나 일부 삭제 후 개봉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검열에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타밀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타밀 나두 일부 지역에서는 상영이 되지 않았다.
라지브 간디의 암살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다룬 타밀 영화로 <꾸뜨라빠티리까이(Kuttrapathirikai, charge sheet)>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1991년 라지브 간디가 죽은 해부터 제작을 시작했으나, 검열에 걸려 개봉을 못하다가 타밀나두 지역에서 타밀 타이거스 훈련 장면과 라지브 간디 암살 장소에서 경찰이 도망가는 장면을 삭제한 후에 2007년에야 상영이 가능해졌다.
2011년 발표된 영화 <우치타나이 무한딸 Uchithanai Muharnthaal>도 검열에 의해 상영이 금지되었으나, 감독인 뿌가젠디 탄가라자(Pugazendhi Thangaraj)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 끝에 개봉을 하게 되었다. 그 영화의 플롯은 스리랑카 정부군에 의해 집단 성폭행을 당한 13살 소녀가 임신을 하자 타밀나두로 불법 이주를 한 후 타밀 나두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녀의 가족을 받아주는 대학교수는 현지 타밀 경찰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이 소녀의 아버지는 스리랑카 정부군의 총에 죽었고 어머니 또한 남편을 찾다가 정부군에 의해 납치된 후 죽었다. 소녀 또한 결국에는 집단 성폭행당시에 감염된 HIV에 의해 죽는다. 인도로서는 스리랑카와의 외교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에 개봉을 꺼려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 영화 <마드라스 카페>가 검열에서 무사히 통과했던 것은 실제 사건을 현실감 있게 다룬 위 영화들과 다르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들은 살짝 피해갔기 때문이다. 그런 이 영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타밀 타이거스와 스리랑카 정부군이 동일하게 악한 폭력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비판하는 이들도 타밀 타이거스가 아이들과 여성들까지도 강제 징집을 하고 자살폭탄조를 운영했던 것은 옹호하지 않는다. 타밀 타이거스도 폭력적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타밀 타이거스가 등장하게 된 ‘검은 칠월(Black July)’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현재 스리랑카의 타밀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타밀인들은 11세기나 12세기부터 인도에서 이주해오던 이들이 소수 있기는 했으나, 스리랑카 인구의 20%나 차지하게 된 것은 영국인들이 스링랑카에 실론티로 알려진 홍차 플래테이션을 시작하면서 대거 타밀 나두에서 타밀인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1948년 영국이 물러나고 스리랑카는 독립을 했지만 당시 100만에 달하던 타밀인들은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1956년 ‘싱라라’ (Singlala, 싱할레스 언어)만이 실론의 공식언어로 인정되었다. 1959년 싱할리 민족주의자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Bandaranaike)가 당선되자 국회를 통해 싱할리를 공용어로, 또 싱할리 인들이 가장 좋은 직장과 가장 권력 있는 자리를 효과적으로 얻을수 있도록 하는 ‘싱할리 제일주의’를 추진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다수의 싱할리족과 영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엘리트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재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타밀족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1972년 국명을 타밀어인 ‘실론(Ceylon)’에서 싱할라어인 ‘스리랑카(Sri Lanka)’로 바꾸면서 그 사이,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북부 타밀족 지역에 불안이 고조되었다.
1972년 헌법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의 위치에 올려놓았고, 대학 내에서 타밀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1977년 주니우스 리차드 자야와데네(Junius Richard Jayewardene)가 당선되자 타밀족 지역에서는 타밀어를 ‘국어’로서의 위치로 인정해주었으나, 그외에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77년 종교에 기반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세속국가인 타밀 엘람 (Tamil Eelam)을 스리랑카 타밀 거주지에 건국한다는 ‘타밀 독립 결의안(Resolution for Independence)’이 타밀인들의 82%의 지지로 채택됐다. 초기 타밀 독립 투쟁 노선은 ‘비폭력노선’이었다.
그러나 ‘검은 칠월'(Black July)이 전환점이 되었다. 1983년 7월 싱할레스 폭동이 발생해 3000명의 타밀들이 살해되었고 2만채의 타밀 집들이 파괴되었다. 수 많은 타밀인들이 도망치듯 스리랑카를 떠났다. 검은 칠월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분기점으로 타밀인들의 정치적 노선은 ‘비폭력 평화노선’에서 ‘무장투쟁’으로 바뀌게 된다. 1985년 말까지 5만여명의 스리랑카인들이 난민촌에 수용돼 있었고, 10만명의 타밀인들이 인도의 타밀나두(Tamil Nadu) 주 수용소 캠프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후 지속되던 내전은 2009년 싱할레스 군대의 ‘무차별 집중 포화’로 몇 달 동안 1만명의 타밀인들이 살해되면서 끝이 났다. 2009년 5월 18일 최고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이 스리랑카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고, 타밀 타이거스가 정부군에 항복하면서 스리랑카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내전의 끝은 아니었다. 타밀 타이거스의 자치 영역이었던 스리랑카 북·동쪽 지역을 싱할레스 군인들이 점령했다. 35만명 타밀이 강제 수용소에 갇혔고, 온 세계로 탈주해 나갔다. 영화가 타밀 타이거스 등장 이유를 전혀 말하지 않은 것에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타밀인들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있는 이들을 분노하게 한 것이다. ‘타밀 타이거스와 스리랑카 정부군은 모두 난폭했고 타밀 타이거스에 의해서 라지브 간디는 암살당했다’라는 내용만으로는 타밀나두의 타밀인들이나 스리랑카 출신의 타밀인들 모두에게 비판 받을 수 밖에 없었다. 8월 인도 국내 상영시작과 동시에 미국, 아랍에미레이트에는 개봉되었지만, 이 영화는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개봉되지 못했다. 스리랑카에서 영국과 캐나다로 탈주한 타밀 디아스포라들이 영화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 내에서는 영화 상영 반대 시위들도 있었다.
두 번째 그룹은 이 영화가 국민회의의 지지율 상승에 기여할 것을 우려하는 정치인들이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인도의 입장은 일관되지 않았다. 인디라 간디는 생전에 스리랑카의 타밀인들을 적극 지지했고, 스리랑카와의 결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방글라데시의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 전쟁에 개입하여 방글라데시 건국을 도운 것은 인도 내 불만을 잠재우면서 그녀의 정치적 지지도를 높게 상승시켰고, 남아시아 내의 어떤 국가라도 인도는 필요시에는 개입할 수 있다는 자기도취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인드라 간디의 자기도취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네팔이 마오이스트 반군에 의해서 왕국이 전복되기 전에는 인도군은 네팔왕과의 협약에 의해 언제라도 필요시에 인도가 판단해서 군대를 네팔에 보낼 수 있는 협정이 있었다. 부탄은 외교권을 인도에 위탁했고, 스리랑카에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독재를 한 가이움(Gayoom) 대통령 체제 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진압을 도왔다. 인디라 간디의 암살에 의한 동정표로 인해 인도 수상이 되었던 라지브 간디의 외교 정책 또한 기존 인도의 외교 정책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1987년에는 스리랑카 북북의 타밀 지역에 구호 물자를 배로 보내다가 스리랑카 정부에 의해 거부 당하자 공군을 이용해 구호물자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까지의 라지브 간디의 행동은 ‘인도 내 타밀인 중심’의 관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물론 자의 보다는 타밀 나두 주 정부의 강한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지브 간디는 ‘남아시아내 인도의 위상’이라는 시각에서 스리랑카 문제에 접근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스리랑카와 스리랑카 영토 내의 신생국 타밀엘람 두 나라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보다는 스리랑카 국가와의 관계를 무난하게 가져가서 인도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정책으로 전환을 했다. 1987년 7월 29일,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라지브 간디와 스리랑카 대통령 자이에와르데네(J. R. Jayewardene)에 의해 조인된 스리랑카 평화협정(Sri Lanka Accord)으로 내전은 잠시 잠잠했다. 타밀 타이거스의 무장 해제를 전제로 한 이 협정에 타이거스의 지도자인 프라바카란(V. Prabhakaran)은 불평이 있었지만 인도에서 자신이 자치 타밀 주의 첫번째 주지사에 오르는 걸 보장해주었으므로 협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싱할리 불교도 극단주의자들은 그 협정을 인도가 스리랑카 북부를 점령하려는 위협으로 보고 격렬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타밀 타이거스가 무기 양도를 주저하고, 인도 평화유지군(IPKF)이 스리랑카로 파병 되었다. 그러나 인도 평화유지군이 스리랑카 북부에 파병 나가 있는 기간 동안 타밀 타이거스에 대한 잔혹한 진압은 타밀인들의 분노를 가져왔다. 한 때 8만명에 이르렀던 IPKF는 스리랑카 정부가 국내 갈등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니 철수해달라는 요구에 의해서 1990년 철수했다. 스리랑카 정부와의 원만한 외교적 관계도 이루지 못했고, 타밀인들에게도 비판만 받는 성과 없는 참전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라지브 간디 암살 사건은 타밀 타이거스 단원으로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라지브 간디에게는 비극이었지만 국민회의 입장에서는 그의 암살은 국민회의가 권력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라지브 간디 총리 시절 온갖 부정부패로 권력을 잃었던 국민회의는 라지브 간디의 암살로 인도 국민들의 동정표를 얻어서 다시 권력을 회복하게 된다.
영화를 통해서 라지브 간디의 비극적 암살 사건이 다시 재조명되는 것은 국민회의의 경쟁 정당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영화 개봉 직후 뭄바이의 BJP 정치인 아쉬쉬 쉘라(Ashish Shelar)는 “이 영화는 다른 이들을 헐뜯는 것으로 특정정당(국민회의. 필자)과 그 정치인들을 영광스럽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라는 발언을 했고 뭄바이에서 상영을 금지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영화와 사회의 관계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들 외에 영화 자체도 비판이 되었다. 주연 배우인 존 아브라함은 라지브 간디 수상의 암살 같은 민감한 이슈를 테러리스트를 막는 비밀요원을 연기하여 보여준 공헌으로 개봉 다음달인 9월에 ‘국가의 긍지(Pride of the Nation)’상을 받았다. 그로서는 일반인들과 섞여 있을 때 드러나지 않는 비밀요원처럼 보이기 위해서 근육질 몸에서 근육을 빼고 평범한 일반인 몸으로 만들면서까지 한 연기를 인정 받은 셈이다. 그러나 감독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마드라스 카페>의 수지트 시르카(Shoojit Sircar)감독은 자신이 발리우드 영화 감독으로서는 드물게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영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처음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는 역사를 소재로 했고, 자신이 근 십년간 라지브 간디와 타밀 타이거스에 대해 연구했다는 말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타밀인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자 감독은 이 영화는 픽션이라고 강하게 변명했다. 라지브 간디 암살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한 후 1998년 란 책을 낸 라지브 샤르마(Rajeev Sharma)는 감독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타밀 타이거스 중앙이 인도인들의 국민적인 반박을 불러올 것을 알고서도 과연 무모하게 라지브 간디 암살사건을 지시를 했는가 아니면 타밀타이거스 조직에서 이탈한 이들의 단독범행인인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또 타밀 타이거스가 아닌 다른 반정부 단체에 의한 것인가 에 대한 의문점도 있다고 했다. 감독이 너무 단편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발리우드 영화인들이 정치나 외교 관련 소재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 때 아마도 꿈꾸는 것은 제 2의 <로자(Roja)>를 만드는 것이다. 파키스탄과의 분쟁을 다룬 마니 라트남(Mani Ratnam) 감독의 <로자>는 해마다 독립기념일에 TV로 방영된다. 왜 <로자>가 해마다 독립 기념일마다 방영되는 영화가 되었는가?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용감한 인도 시민이 파키스탄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를 당했다. 그는 조국 인도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운다 이다. 파키스탄 테러리스트가 인도의 국기를 불에 태우자 주인공이 몸을 날려서 그 불 위에 몸을 덮쳐서 불을 끄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주인공의 아내가 완전 정장의 사리를 입고 외출용 샌달을 신은 채 남편을 찾기 위해서 군인들과 함께 테러리스트들에게 달려가는 장면도 그에 못지 않게 감동적이다. 테러리스트 진압을 위해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어떻게 사리를 입은 여자과 함께 전투에 나가는가 하는 상식적인 물음은 발리우드 영화에서는 쉽게 무시되곤 한다.
<로자>가 해마다 독립 기념일에 방영되는 이유는 영화가 인도, 파키스탄 충돌의 원인인 까슈미르 문제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리우드 관객들은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하고 영화를 본다. 그런데 <마드라스 카페>는 <로자>처럼 이런 눈물 나는 장면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보다는 감독이 알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밀인들의 현실은 반영하지도 못했다. 물론 현실을 반영했다면 스리랑카와 라지브 간디를 다룬 다른 영화들처럼 검열에 걸려서 개봉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라지브 간디 암살 후에 국민회의가 권력을 다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인도 대다수 국민들이 느끼던 정서인 ‘젊디 젊은 사람이 흉악한 폭탄 테러로 죽다니. 어린 아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그의 어머니 또한 암살을 당했건만.’ 때문이었다. 이 정서는 스리랑카 내의 타밀인 문제와 인도의 개입 실패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영화 <마드라스 카페>는 이런 정서를 불러오는데 집중했었어야 제 2의 <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호영 자다푸르 대학 사회학 박사 과정>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