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칼럼] 인도인에게 영어는? 한국인에게 힌디어는?

인도는 국어(National Language)가 없는 나라다. 우리와 같이 단일 언어의 전통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인도에는 공용어(Official Language)만이 있다. 그 공용어의 종류나 운영방법도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먼저 연방정부의 공식적인 행사와 문서에서는 ‘데바나가리(Devanagari)문자의 힌디어(Hindi)’가 연방공용어로 사용되고 영어는 힌디어를 보조하는 ‘준 연방공용어(Subsidiary official language)’의 역할을 한다. 인도의 지폐 앞면 중심 상단에 힌디어로 ‘인도연방은행’이라고 표기되고 그 바로 밑에 작은 크기의 영어가 같은 내용을 나타내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두 번째로 각 주의 공식적인 행사와 문서에서 사용되는 주 공용어(State Official Language)들이 존재한다. 인도 헌법은 각 주에게 그들의 공용어를 선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한을 주고 있으므로 헌법 별표 8(8th Schedule)의 주 공용어는 22개이고, 이 별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각 주가 필요에 의해 인정하는 주 공용어들이 다수 있다. 주와 주 그리고 주와 연방사이의 의사소통방식도 다양하다.

주와 주 사이에서는 힌디어 또는 영어 혹은 영어번역문이 첨부된 힌디어 문서가 교환된다. 주와 연방 사이에서는 힌디어 사용주와 연방은 힌디어로, 힌디어 비사용주와 연방은 힌디어 또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인도에는 대체로 300~400개의 언어들이 존재하며 1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만 해도 20여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는 그 문명의 초기부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존재했었고 역사적으로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계가 들어선 일이 없었으므로 각 지역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발전시켜 왔었다.

물론 과거에도 서로 다른 지역 사이의 소통수단으로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가 사용되기는 했었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의 지식인에게 한정된 일이었을 뿐이다. 인도에서 영어가 지역 간 소통언어(Link Language)로 등장한 것은 영국 통치 이후였다.

영국인들은 식민지배의 도구가 될 ‘영어가 가능한 원주민 서기’들을 양성하기 위해 인도의 주요도시들에 대학교들을 세웠고 그 강의와 시험을 영어로 진행하게 하였다. 이 결과 외국어인 영어가 행정언어, 교육언어 더 나가서는 소통언어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도인들은 영어를 잘한다’ 또는 ‘영어만 하면 인도생활에는 아무 불편이 없다’는 식 으로 영어의 역할이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12억 인구 중 일상생활과 업무에서 아무 불편 없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3~4%에 지나지 않고, 영어가 그럭저럭 가능한 사람은 1억 명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영어는 일반서민들의 언어가 아니라 배운 사람 즉, 대학을 다닌 지식인들의 언어이다. 재작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었던 인도영화 ‘세 얼간이(Three Idiots)’는 힌디어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알 이즈 웰(All is well: 알은 All의 인도식 발음)’은 그 주인공들이 대학생이기 때문에 사용된 영어였던 것이다.

만약 주인공이 농부였다면 ‘쌉 티크 헤(Sab Tthik Hai)’또는 ‘쌉 아차 헤(Sab Accha hai)’등과 같은 뜻의 힌디어가 사용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조적인 이야기도 오고 간다. “새로 이사를 갔다면 영자신문을 구독하라. 대문 앞에 떨어져 있는 그 영자신문을 보고 동네사람들은 당신을 배운 사람으로 대접할 것이다.”

사실상, 인도에서 소위 출세를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다. 영어로 교육하는 사립초등학교의 원서접수날에는 도로가 마비될 정도로 자가용들이 몰려들고 간혹 입시부정을 저지른 학교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일도 있다. 명문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는 영어수업의 압력에 못 이겨 해마다 10여명이 자살하기도 한다.

인도 최고의 수재들만이 입학하는 IIT에서도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영어강좌를 확대하고 있다. 대도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가장 눈에 많이 뜨이는 것 중의 하나가 영어 학원 간판이다. 영어는 경제적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모든 인도인들의 로망임에 틀림없다.

한편 연방공용어인 힌디어의 지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1964년부터 힌디어를 유일한 연방공용어로 인정한다는, 즉 영어를 연방공용어에서 제외한다는 제헌의회의 결정은 비힌디어 지역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법률에 의해 힌디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정책의 한계를 절감한 연방정부는 ‘1968년 3개 언어 교육정책(Three-Language Formular 1968)’라는 장기적이고 우회적인 전략을 선택했다.

힌디어 지역 학생들은 힌디어, 영어 그리고 남부인도어의 하나를, 또 비힌디어 지역에서는 지역언어, 힌디어, 영어를 필수적으로 이수하게 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예상과 달리 이 정책은 반(反)힌디어 정서를 누그러뜨리는데 성공적이었다. 이와 같은 성공을 대표하는 사건으로는 2006년 재무장관이었던 치담바람(P. Chidambaram)의 기자회견 일화를 들 수 있다.

이 회견에서 한 기자가 힌디어로 질문하자 치담바람은 ‘영어로 다시 질문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연방장관이 힌디어도 하지 못하냐!’는 여론의 격렬한 질타를 받았다. 과거같았으면 반힌디어 정서가 가장 강한 따밀 나두 주 출신인 치담바람이 힌디어를 못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병역이행이 한국의 장관 임명에서 관건이 되듯이 인도에서는 힌디어 능력이 연방 장관의 주요 자격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입장에서 힌디어는 오랫동안 ‘계륵(鷄肋)’과 같이 매우 애매한 존재였다. ‘배우자니 귀찮고 안배우자니 불편할 것’ 같은 것이 힌디어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도를 단기간 그것도 유명관광지를 중심으로 여행하는 사람 또는 인도와 사업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현지에 장기체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힌디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

관광시설이나 관광지에서 일하는 인도인들 또 외국기업과 비즈니스를 하는 인도인들은 자기 업무와 관련된 영어가 가능하므로 힌디어를 모른다고 해도 불편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힌디어는 전혀 필요 없어!’라고 힌디어를 비하하는 막말까지 하는 것은 인도의 변화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변화의 시작은 반 힌디어 정서의 감소에서 찾을 수 있다. 1997년에 인도독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인도의 3대 시사지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힌디어가 연방공용어로서 뿐만 아니라 소통언어로서의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힌디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는 인구는 전체의 40%이지만 힌디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인구의 66%로 독립 당시 30% 미만이었던 수치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힌디어 강세지역인 북부지역은 94%가 그리고 반 힌디어정서가 가장 강했던 남부지역에서도 24%가 힌디어 회화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변화는 인도 국내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정부는 2007년부터 힌디어를 비롯한 5개 외국어를 유치원 단계부터 대학교까지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국가안보언어정책구상(National Security Language Initiative: 후에 Critical Language Scholarship 등으로 구체화)’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영어만 하면 다 통하는 인도’의 힌디어를 미국인들이 배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도의 일간지인 힌두스탄 타임스(Hindustan Times)는 2007년 3월 5일 보도에서 ‘한국인들이 힌디어 수업을 점령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델리에 거주하는 한국인 학생, 회사원들이 델리대학교 등의 힌디어 단기연수과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기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도에 진출해 있는 대부분의 우리 기업들은 아직 힌디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업들의 조직은, 다른 외국기업들도 거의 유사하지만, 상층부에 한국인 직원들, 중간 관리직은 영어가 가능한 인도인, 하층부에는 영어 사용이 극히 불편한 인도인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인 직원들은 중간 관리직에게 영어로 지시하고, 중간관리직은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힌디어로 다시 지시한다. 이런 의사소통 형태는 1954년까지 프랑스 식민지였던 뿌두체리(Puducherry, 이전의 Pondicherry)의 도시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뿌두체리는 크게 프랑스인 거주구역과 인도인 거주구역으로 나뉘고 그 사이에는 해자의 역할을 하는 운하가 놓여 있다. 양쪽 구역의 통행은 군데군데 놓여있는 몇 개의 다리를 통해 가능할 뿐 완전히 격리된 세계와 다름없다.

프랑스인들은 별세계(別世界)에서 살면서 몇몇 인도인들을 앞세워 식민지를 유지했던 것이다. 우리가 인도를 식민통치를 하러 갔다면 뿌두체리의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처지도 아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작년 7월 마루띠-스즈키(Maruti-Suzuki) 공장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폭동의 원인 중 하나가 ‘일본인 직원들이 힌디어도 하지 못하고 회사와 노동자사이의 교섭에도 인도인 직원을 내세운다’는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식민 체제를 모방한 조직 관리가 더 이상 인도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를 따라가지 못함을 나타내는 사례로 보아야 한다.

인도인들도 우리가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에게 호감을 갖듯이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가깝게 느낀다. 이제 우리 기업들도 부품의 현지생산과 판매 전략의 현지화만을 강조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12억 인구의 약 30%가 14세 이하이고 전체 인구의 평균연령이 26.5세에 불과한, 거의 무궁무진하다고 불러도 좋을 인도의 노동과 소비시장에서 우리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 또 인도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다가서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현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힌디어는 우리들에게 성공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교수>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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