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 칼럼] 인도의 전통 상인 ‘마르와리’ 가문
마르와리 가문?인도?IT 유통업 90% 장악
요즘 델리(Delhi) 방면에서 인도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라자스탄(Rajasthan)은 필수코스가 되고 있다. 델리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다는 점,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는 사막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여행자들을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주(州)인 라자스탄은 매력적인 곳이다. 사막의 황량하고 처절한 아름다움, 라즈뿌뜨(Rajput)들이 지은 웅장한 성채들, 사막의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아니 글자 그대로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은 잊지 못할 여행의 추억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자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중요한 사실은 이 사막이 마르와리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원래 ‘사막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마르와리는 인도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는 상인집단이다. 태어나고 살아온 곳의 지질이 척박하여 다른 지방 또는 나라로 진출하여 성공했던 중국의 휘상(徽商)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상인집단이다. 마르와리가 인도 내의 다른 지역에까지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무갈(Mughal)제국 통치 시기인 1564년이었다.
그 당시 벵갈(Bengal)지방에 파견되어 있던 라즈뿌뜨 병사들에게 식량 등의 군수품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은 마르와리 상인들이 그대로 정착하면서 그 이산(離散)의 역사를 시작했다. 마르와리라는 막연한 단어가 하나의 상인집단을 가리키는 의미로 통용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들은 조폐와 금융 그리고 상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콜카타(Kolkata)에서 일정부분의 상권을 장악했고, 그 이후 동부인도 즉, 현재의 비하르(Bihar)에서 방글라데시(Bangladesh)에 이르는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영국의 지배가 시작된 후에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 정책에 편승하여 현재의 미얀마(Myanmar)에까지 진출했다. 마르와리들은 이 지역들의 은행, 금융 그리고 훈디(Hundi: 이슬람세계에서? 유래한 송금제도) 또 황마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독립 이후에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마르와리들의 사업 확장에 제약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부는 해외 진출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고, 해외로 나갈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인도의 서부 및 남부의 오지(奧地)에까지 진출했다.? ‘기차가 가지 못하는 곳에 황소수레는 가고, 황소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에는 마르와리가 간다.(Jahan naa pahunche rail gadi, wahan pahunche bail gadi, aur jahan naa pahunche bail gadi, wahan pahunche Marwari)’는 전설이 생겨난 것이다.
마르와리들은 가문의 전통적인 업종에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첨단산업 중의 하나인? IT유통업 점유율에 있어서 전국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콜카타의 경우에는 90%를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수프림 컴퓨터(Supreme Computers)’의 라께쉬 제인(Rakesh Jain)과 ‘잘란 인포테크(Jalan Infotech)’의 아룬 잘란(Arun Jalan)은 각각 섬유업자와 고무제품제조업자 가문의 후손이지만, 전혀 관계없는 IT 유통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마르와리에게는 지리적인 한계 뿐 아니라 사업 분야에도 그 한계가 없는 것이다. 마르와리의 전체인구는 조사된 적이 없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약 300만 명을 넘지 않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마르와리 가문들은 수십 개에 달한다. 황마와 면 산업에서 성공을 거두어 이미 1920년대에 재벌이 된 빌라(Birla)가문을 제외하고도 미딸(Mittal), 힌두자(Hinduja), 루이아(Ruia), 진달(Jindal), 제인(Jain), 아가르왈(Agarwal)? 등 1억불 이상의 재산을 가진 가문들이 19개에 이른다.?특히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락쉬미 미딸(Lakshmi Mittal)은 그 재산이 약 160억불로, 2013년 10월 포브스(Fobes)가 선정한 인도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41번째의 부자이다.
카스트제도 별 영향 못 미쳐
마르와리는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인도의 다른 집단들과 달리, 종교 또는 카스트와 같은 혈연적?직업적 공동체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종교적으로 마르와리는 힌두(Hindu)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이나교도(Jains)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마르와리 공동체내에서 이 두 종교의 신자들은 활발하게 교류하며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종교의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두 종교집단의 이질성은 점점 사라져 왔고 마르와리적인 정체성이 이들을 결속시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 현재 마르와리들은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ha)로 분류되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농부, 무역상, 무사계급인 라즈뿌뜨, 브라만(Brahman) 등 다양한 카스트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위 ‘철(鐵)의 규칙’이라고 부르는 카스트제도의 세습성이 그들에게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와리는 인도의 사회집단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탈종교적 그리고 탈카스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절대다수의 인도 상인들은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기득권적인 연고(緣故)들을 바탕으로 사업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마르와리는 고향에서 2000km 이상 떨어진, 실질적으로 외국과 다름없는 지역에서 성공의 기반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업의 지리적 영역을 지속적이고 저돌적으로 확장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주민들의 심각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는 점도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와리의 성공은 인도 역사상 매우 특별한 것임에 틀림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르와리 성공의 첫 번째 요인은 정직성이다. 인도의 속설 중에는 ‘마르와리는 자신의 말과 밥(飯)을 위해서 목숨도 내놓을 것이다.(Marwari baat aur bhaat ke liye jaan bhi dega.)’라는 말이 있다. 물론 마르와리의 미식가적인 습성을 비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약속을 잘 지킨다는 뜻이 더 강하다. 인도 상인집단들 중에서 가장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정직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지역에 정착한 마르와리가 지역주의와 카스트에 대한 충성심의 높은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정직성을 통해 신용을 쌓아가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산(離散)으로 대표되는 진취성이다. 인도에는 로하나(Lohana), 바띠아(Bhatia), 아로라(Arora) 등 역사적으로 명성을 얻은 상인 카스트 또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의 지역에 안주하였을 뿐이지 마르와리처럼 범인도적인(Pan-Indian) 네트워크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마르와리는 바사(Basa:? 마르와리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라는 독특한 장치를 고안하여 정보교환과 사업진출의 네트워크로 또 이산의 불리한 점을 극복하는 협동의 장소로 사용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이 진취성이 지리적 확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선조들의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사업상의 전망이 있는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을 서슴지 않는다. IT와 생명과학 분야에서의 그들의 약진이 그 단적인 예이다.
셋째, 철저한 현지화이다. 화교(華僑)들과 달리 다른 지역에 정착한 마르와리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마르와르 어(語)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뻔잡(Punjab)의 마르와리는 뻔잡어를, 콜카타의 그들은 벵갈어만을 사용한다. 이것을 단순히 모국어에 대한 애착의 결핍으로 폄하하기 보다는 원주민들과의 이질성을 없애기 위한 현지화의 결과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자선 사업에서도 이런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정착에 성공한 지역에서 그들은 학교. 사원. 병원 등의 건설에 많은 기부를 한다. 즉, 자신들이 축적한 부의 일부를 지역사회에 환원함으로써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방지했던 것이다.
진취성, 정직성에 선택과 집중 강점
이와 같은 마르와리의 장점들의 화신(化身)이라고 해도 좋을 인물이 있었다. 람끄리쉬나 달미아(Ramkrishna Dalmia: 1893-1978)가 바로 그다. 달미아는 라자스탄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말도 배우기 전에 가족 모두와 함께 콜카타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가 한 푼의 재산도 남기지 못한 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달미아가 18세가 되던 해였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은(銀)거래시장에 발을 딛게 된다. 20여년 동안 은 거래시장에서 경험과 재산을 쌓은 그는 1933년 비하르(Bihar)주에 설탕공장을 세워 기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 후 그는 저돌적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1943년에는 시멘트, 석면, 제지, 전력판매, 은행, 보험회사 심지어는 신문사 등까지 20여개의 기업군을 소유한, 글자 그대로의 타이쿤(Tycoon)으로서 달미아 그룹(Dalmia Group)을 지배한다. 달미아나가르(Dalmianagar)라는 그의 이름을 붙인 도시가 있을 정도로 그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도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자선가였고 독실한 힌두교도였으며, 정치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독립 인도 초대 재무장관의 물망에 올랐고, 일생동안 여섯 번 결혼하여 모두 18명의 자녀를 둔 정력가이기도 했다. 1947년 달미아는 그룹을 세 개로 분리하여 은행, 보험 등을 제외한 사업들은 친동생과 사위에게 나누어 준다. 그러나 1956년 달미아는 배임혐의로 고발되어 2,500만 루피의 벌금과 2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기업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그때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그의 후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지금도 약 40억불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미아의 일생이 보여주듯이 마르와리의 융성은 창업 1세대의 야수(野獸)와 같은 저돌성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그들은 시장의 흐름을 재빠르게 간파하여 그것에 적응하고 마르와리 네트워크를 이용한 저돌적인 투자를 통하여 기업을 확장해 나갔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21세기에도 마르와리의 장점을 극대화한 달미아와 같은 풍운아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달미아 등 창업 1세대의 성공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가져온 혼란, 산업주의(Industrialism)의 잔재 그리고 식민지의 해방이라는 20세기적 현상의 산물이기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금융과 첨단기술 중심의 21세기의 경제 환경에서 생산과 유통 거기에 금융까지 동시에 장악하는 제 2의 달미아가 등장하기는 쉽지 않다.
미딸, 빌라, 아가르왈 등 몇몇 마르와리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업종에서는 ‘선택과 집중’,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범세계적 규모의 ‘이산’을 시도하는 것이 마르와리의 명성을 유지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와리들은 16세기 사막을 떠날 때 못지않게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