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 칼럼] 인도 라훌 간디, 바보 왕자? 왕의 귀환?

네루-간디 가문의 네 번째 세대 라훌 간디 국민회의당 부의장?<사진=신화사>

42세 라훌 집안 배경 삼아 쉽게 정치계 입문???

라훌 간디(Rahul Gandhi)는 현재 연방하원의원이고 집권 국민회의당(Congress)의 부의장이며 2014년 총선거의 선거대책위원장인 동시에 유력한 차기수상 후보 중의 한 사람이다. 정치인들의 평균연령이 65세인 인도에서 불과 42세의 라훌이 이 정도의 지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도 정치의 젊은 피’로 상징화될 수도 있는 라훌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라훌의 현재 지위가 자신의 능력보다는 가문의 후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라훌은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수상인 자와하랄 네루의 증손자이다. 그의 할머니인 인디라 간디와 아버지인 라지브 간디도 수상을 역임했으며, 이 세 사람이 수상으로 재직한 기간은 햇수로 48년에 달한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래 약 70%에 해당하는 기간을 한 가문의 아버지, 딸, 손자가 통치했다는 것은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에도 라지브의 부인이자 라훌의 어머니인 소니아 간디는 집권 국민회의당의 당의장이다. 라훌은, 중국무협소설의 작가라면 ‘인도 제1가(印度第一家)’라고 이름 붙였을, 네루-간디(Nehru ? Gandhi)가문의 네 번째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라훌은 1970년 델리에서 라지브 간디와 이탈리아 출신의 어머니 소니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치적 명문이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운 가문 출신이었지만 라훌이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1984년 할머니인 인디라 간디 수상이 시크교도 경호원에 의해 피살되고 라지브가 수상이 되자 경호상의 이유로 정규교육과정을 포기할 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을 하나 뿐인 여동생 (Priyanka)과 함께 집에서 가정교사를 통해 마친 것이다. 인격형성과 사회적 관계 설정에 매우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기를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 둘러 싸여 보냈다.??1989년 델리대학교에 입학하여 일단 정규교육과정으로 돌아왔지만 1학년을 마치자마자 미국의 하바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하바드대학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91년 아버지인 라지브가 암살당하자 다시 경호 상의 이유로 플로리다 주의 롤린스(Rollins)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라울 빈치(Raul Vinci)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학 당국자와 보안관계자뿐이었다고 한다. 1994년 학사학위를 받은 라훌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Trinity)대학의 1년짜리 개발경제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95년 학위를 받았다. 파란만장했던 교육과정이 드디어 끝났지만 라훌은 인도에 영구 귀국할 수 없었다. 보안문제도 있었지만 네루-간디 가의 정치적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소니아는 라지브 간디 암살사건의 진상규명에 미온적인 국민회의당 집행부와 대립 중이었고, 사실상 라훌이 돌아온다고 해도 25세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라훌은 런던의 한 투자자문회사에 취직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약 7년 뒤인 2002년 라훌은 뭄바이에 ‘Backops Services’라는 기술자문회사를 설립하여 인도에 영구 귀국한다. 명목상으로는 네루-간디 가문의 친지들이 이 회사의 이사 또는 투자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라훌이 전체 지분의 83%를 가진 사실상 개인소유의 기업이었다. 라훌은 정계에 입문한 후에도 5년 동안 이 회사에 관여했었지만 경영에서 큰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2004년 3월 라훌은 14차 연방 하원의원 총선거에 우따르 쁘라데시 주의 아메티(Amethi)에서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메티는 오랫동안 네루-간디 가문의 권력기반이었다. 라훌의 증조할아버지인 네루는 물론 그의 숙부 싼자이(Sanjay), 아버지 라지브, 어머니 소니아도 이 선거구를 통해 정계에 진출했었다. 인도 최고 정치 명문의 장남이 출마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논란이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라훌의 출마는 일반시민들은 물론이고 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핵심은 ‘여동생인 쁘리양까가 아니고 왜 라훌이냐?’는 것이었다. 사실, 대중적인 인기, 정치적 친화력 그리고 카리스마에 있어서 쁘리양카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라훌이 영국에서 숨을 죽이며 살던 1999년에 어머니 소니아의 선거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끈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훌 간디가 지난 9월 총선 기간에 지역민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AP>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약간 모자라는 행운아’ 이미지 강해

여하튼 라훌은 2004년 총선거에서 경쟁자보다 10만표나 앞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라훌 개인의 인기라기보다는 아메티가 ‘네루-간디 가’의 본거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하원의원이 된 후 약 2년 동안 라훌은 정부나 국민회의당 내에서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국민회의당의 젊은 아이콘으로 부각되었다. 뚜렷한 차기 지도자가 없다는 고민을 안고 있던 국민회의당으로서는 라훌을 당의 새로운 얼굴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훌 효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2007년 라훌은 자신의 선거구가 있는 우따르 쁘라데시의 주의회 선거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거 총책임자의 역할을 하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총 403개의 의석 중 22개, 투표자 8.53%만의 지지를 얻었을 뿐이었다. ‘네루-간디 가’의 브랜드 파워도 우따르 쁘라데시의 빈곤한 유권자들에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라훌 자신도 그들에게 어떤 희망의 메시지도 주지 못했다. 소니아 간디를 비롯한 국민회의당 지도자들은 라훌의 실패가 조직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9월 라훌은 국민회의당 전국위원회(All India Congress Committee)을 비롯하여 국민회의당 하부청년조직들인 인도청년국민회의(Indian Youth Congress)와 전인도학생연합(National Students Union of India)의 사무총장(General Secretary)으로 임명하여 당(黨)과 대중조직에서 권력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009년 연방 하원의원 총선거는 라훌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선거구에서는 무려 33만3000표 차이로 승리했고 자신이 선거운동을 책임졌던 우따르 쁘라데시 주에서는 지난 선거에 비해 의석수를 2배 이상 늘리는데 성공했다. 선거운동에서 라훌은 6주 동안 125곳의 유세에 참석하여 연설하는 열정을 보여 ‘국민회의당의 미래(Future of Congress)’라는 극찬을 언론들로부터 받기도 했다.

그러나 라훌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2년 우따르 쁘라데시 주의회 선거에서 라훌은 2개월 동안 200번의 유세를 하는 등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보다 겨우 5석 많은 28석을 차지하는데 그쳐 국민회의당은 4위의 정당으로 전락했다. 특히 라훌의 본거지인 아메티에 인접한 15곳의 선거구 중 2곳에서만 승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라훌의 지지자들은 연방의회와 주의회의 선거는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나온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강변했지만 2009년 이후 치솟던 라훌의 미래에 찬물을 끼얹는 현실이었음에 틀림없다.

2013년 1월 국민회의당은 라훌을 국민회의당 부의장으로 임명한다. 당의장인 어머니 소니아를 제외한다면 국민회의당 내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소식을 알리는 인터넷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인도에는 아직 왕조 통치가 지속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공무원이나 군인이 되기 위해 많은 시험들을 통과해야 하지만 왕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왕이 된다. 누군가 라훌에게 물어보았으면 한다. 그가 그 직위에 오르기 위해 당과 국가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고’. 이 댓글의 내용에 많은 인도인들이 동의한다.

정치에 입문한지 9년도 채 되지 않아 인도 집권당의 부의장이 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라훌의 아버지인 라지브가 정치입문 3년 만에 수상이 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수상의 암살과 그에 따른 국가적 위기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라훌이 지난 기간 동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어떤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그를 그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약간 모자라는 행운아’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아마 이 점은 라훌 자신도 잘 깨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여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라훌은 ‘내가 정치적 집안 출신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돈, 가족, 친구들이 없다면 정치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쉽게 정치에 입문했다’고 고백하며 ‘이런 악습을 바꾸겠다’고 이야기했다. 또 2011년에는 토지보상금 문제로 우따르 쁘라데시 주정부와 대립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라훌은 대중연설에서 ‘꿈을 가지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지난 9월 17일에도 15만명이 모인 라자스탄의 한 집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장 큰 꿈을 가져야 한다. 여기 참석한 여인들은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의 자식들이 그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꿈을 가져야 한다…(중략)… 만약 가난한 사람이 꿈을 가지지 못한다면 정치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자신의 범상하지 않은 지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농부들을 위해 경찰과 극렬하게 대립하더라도 또 찬란한 미래에 대한 꿈을 역설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힘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도인들은 라훌이 인도 제일의 정치 명문의 후계자답게 여느 정치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라훌은 그 기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라훌의 많은 행동과 말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공허한 외침일? 뿐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라훌은 정치를 지나치게 현학(玄學)적이고 낭만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2013년 8월 알라하바드의 한 집회에서 ‘가난은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일 뿐이다. 가난은 음식, 돈 또는 물질적인 것들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여 언론과 야당의 십자포화뿐만 아니라 인터넷 댓글에서도 ‘바보(Idiot)’라는 조롱을 자초했다. 라훌이 가난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철학자나 성직자가 할 이야기이지 정치가인 그가 할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뭄바이의 싸따 시장(Satta Bazaar)의 도박사들은 지난 9월 21일 현재 2014년 총선거에서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에게 1:1.3, 라훌에게 1:3의 승률로 돈을 걸고 있다. 1루피를 걸었을 경우 모디가 승리하면 1.3루피를, 라훌의 경우에는 3루피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즉, 다음 선거에서 라훌이 승리할 가능성이 모디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도박사들은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2012년 이래의 경제위기, 국민회의당의 부패 그리고 라훌 자신의 무능력 거기다 경제부흥의 해결사로 자처하는 강력한 야당 경쟁자 모디의 존재 때문에 라훌의 국민회의당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네루-간디왕조를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왕으로서 귀환하기 위해서 라훌에게는 더 많은 자기성찰과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훈련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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