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칼럼] 브루나이…이슬람국 왕족법 집행은 누가?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

40만명 小國 그러나 富國 ‘브루나이’의 고민??

2008년 6월 11일, 영국 법원은 이날 예정된 심리에 무단으로 불참한 한 피의자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 사건이 특히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물론 담당인 피터 스미스 판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 다빈치 코드의 표절 사건을 담당한 판사여서이기도 했지만, 그 피의자가 영국법의 적용을 받는 영국 사람이 아니라 브루나이를 통치하는 술탄 하사날 볼키아의 친동생인 제프리 볼키아였기 때문이다.

스미스 판사는 판결에서 제프리 왕자가 영국에 입국하는 순간 체포될 것이며 또 그가 체포 이후 보석을 신청한다면 그는 “나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변호인단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으며 영장을 발부했다. 브루나이투자청 (Brunei Investment Authority) 의장이자 재무장관으로 약 13년간 일하면서 약 400억불을 착복한 혐의의 제프리 왕자를 상대로 브루나이정부는 술탄을 대리해서 2000년대 초반부터 제프리의 해외자산을 동결하고 금융거래를 금하는 다양한 법적 소송을 세계 여러 곳에서 제기했다.

지루했던 법적 공방은 2007년, 최종심격인 영국의 추밀원(Privy Council)이 브루나이정부의 견해를 지지함으로 일단락이 났고, 이듬해 스미스 판사의 심리는 제프리 왕자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이슬람국가의 수장인 술탄이나 왕족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을 때 누가 어떤 방식으로 법 집행을 할 것인가, 혹은 법 집행자체가 과연 가능하냐는 것이다. 둘째는, 만약 어떤 형태로든 법 집행을 한다면, 왜 이 사건에 대한 최종심이 술탄의 가족회의 같은 것이 아니라 브루나이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의 기관이 맡았는가 하는 것이다.

추밀원은 한때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현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다분히 형식적인 자문 기관으로 축소됐다. 추밀원의 사법위원회는 특히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기능이 있었는데 이는 영국 연방의 자치령과 식민지 법정에서 들어오는 상소를 처리하고 식민지 법원의 최종법원 역할을 하되 선결례(先決例)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식민지 법정에서 결정하지 못하는 중요한 사건을 몇 달 몇 년이 걸려 영국 국왕에게 상소하고 런던에서 판단하는 이 기나긴 사법의 여정은 식민지 국민에게 세상의 중심이 런던이고 식민지는 변방이라는 인식을 오랜 기간 뿌리내리게 했다. 보통 그러한 식민지배를 끝내는 것이 행위의 자유만이 아니라 인식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의 지도층이 암스테르담에서, 베트남의 지도층이 파리에서, 그리고 필리핀의 지도층이 마드리드와 워싱턴을 돌며 법적 공방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무척 어색할 것이다.

무엇보다 추밀원의 권한과 기능은 영국정부가 정한 것이다. 식민지배를 끝낸 독립국가가 굳이 예전의 식민지배자에게 그들의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는 것은 독립국가의 사법권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것이다. 물론 추밀원의 입장이 언제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지 정책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여성은 공직에 진출하는 것을 금하는 캐나다 대법원 판결을 추밀원이 뒤집으며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킨 것은 추밀원이라는 해외법원이 가진 순기능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주권국가로서 캐나다는 독립하자마자 그들의 최고법원은 런던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타와에 있음을 명확히 했고, 대법원 판결에 불복해 추밀원으로 항소하는 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권국가로서 브루나이는 영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왕립브루나이 대학생 전원 장학금?등하교 자가용 연료비까지 지급????

브루나이는 인구 약 40만 명의 소국이지만 석유와 천연가스 등 막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싱가포르와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부국이다. 브루나이가 흥미로운 점은 현대 정치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절대지배자인 술탄이 통치하는 이슬람국가라는 것이다. 무려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세계 최고 (最古)의 이슬람국가로 술탄이 정치-경제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브루나이 술탄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소유한 재산의 무려 30배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하는 브루나이 유전이 전부 왕실 소유이기 때문이다.

브루나이는 16~17세기에 지역 왕국으로 성장하였으나 이어진 서구 열강의 동남아시아 쟁탈전에 서서히 힘을 잃고 또 자국 내의 반란을 적시에 진압하는데 실패해 결국 1888년 영국의 보호령이 됐다. 본래 이 시기의 브루나이는 영토가 축소되고 인구도 현격히 줄어 국가로서의 기능 자체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1920년대 후반 발견된 막대한 양의 석유는 이 동남아시아 소국(小國)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줬다.

1959년에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3년 뒤 첫 선거를 실시했는데, 문제는 이 선거에서 브루나이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술탄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치부돼 선거 자체가 무효화되고 국민당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는 것이다. 이어 1968년 제 29대 술탄에 오른 하사날 볼키아는 수상과 국방장관을 겸하며 술탄위주의 정치체제를 완전히 고착시킨 후에야 1984년 1월 1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축적된 국부(國富)의 혜택을 일반 국민에게 확대 적용함으로써 브루나이의 국가체제는 어느 정도 안정돼 보인다. 최근의 부탄의 경우처럼 종교에 기반한 절대권력이 점점 사라지는 현대정치에서도 하사날 정권이, 혹은 더 정확히 술탄체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약 20% 정도 되는 노동인구의 약 70%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술탄정부 하에서 일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 브루나이 지식인 사회를 담당할 왕립브루나이 대학 재학생들 전원에게 장학금 및 등하교 자가용 연료비까지 지급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부의 분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절대권력 하에서나 생기는 문제, 즉 민주주의와 인권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술탄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단체는 해산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고 국제 사회에서 이슈화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우려를 낳고 있다.

자국 내 반대세력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브루나이가 영국을 후원자로서 활용하고 있다는 정치적 해석에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배자의 관계가 항상 서로 적대적일 것이라는 상상은 다소 편협하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영국에 대한, 동티모르의 포르투갈에 대한, 그리고 브루나이의 영국에 대한 국민감정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만큼 뜨겁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말레이시아가 국가기조로 아시아를 배우자는 동방정책 (Look East Policy)을 펼칠 때도 가장 많은 수의 말레이계 유학생을 국비로 영국에 보냈고, 동티모르는 독립 후 인구의 채 10%도 구사하지 못하는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정했다. 브루나이는 심지어 1995년, 영국의 식민지 관료, 외교관, 혹은 스파이까지 키워내며 영국의 효율적 식민지배의 일익을 담당한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 대학(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에 브루나이 갤러리라는 건물을 지어 무상으로 기증까지 한다.

브루나이 갤러리가 세계의 다양한 식민지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진열한 대영박물관 바로 뒤에 위치한다는 것은 실로 교훈적이다. 물론 그렇게 ‘수집한’ 물건을 무료로 보여주는 대영박물관이 돈을 받고 보여주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중국이 도쿄제국대학에 중국 갤러리라는 건물을 무상 기증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지 상상해본다면, 비록 정치적 필요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의심은 버리지 못 하더라도, 브루나이와 영국의 관계는 보다 우호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친영파를, 베트남에서 친프파를, 인도네시아에서 친네파를, 동티모르에서 친포파를 구분하는 것이 중국에서 친일파를 구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식민지배를 끝내는 것과 식민의 기억을 극복하는 것에는 어떤 간극이 있음을 깨닫는다. 식민지배의 전과 후를 넘어 현재 40년이 넘게 브루나이를 통치하고 있는 하사날 볼키아 술탄에 대한 시각은 그래서 두 가지이다.

과연 그는 강력한 리더십의 통치자인가 혹은 식민주의적 독재자인가. 사실 20세기에 식민지배를 벗어난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리더십과 독재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해왔다. 그럼에도 브루나이가 특별한 이유는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그 나름의 답을 때로는 국민이 때로는 시간이 찾아준 데에 반해 브루나이는 앞으로도 계속, 신의 뜻에 따라서 (inshallah: if Allah wills it), 이 질문을 마주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명교 한국외국어대 마인어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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