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킬리스 실종 김군 부모님께 “희망은 엄마밖에 없습니다”
[아시아엔=이신석 분쟁지역여행가] 저는 분쟁지역만 다니는 여행자입니다. 앞서 몇차례 <아시아엔>에 올린 글에서 밝혔듯이, 킬리스 인근에서 사랑하는 친구를 보낸 적도 있었고. 젊은 시절에는 용병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김군이 실종되기 전까지는 한국인으로는 가장 최근에 킬리스를 방문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군이 그곳에 도착하기 두달 쯤 전인 작년 11월에 다녀왔습니다. 김군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행적과 모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이란에서 터키로 넘어온 저는 가지안텝에서 킬리스로 가는 버스편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출발시간과 연결성이 무척 안 좋았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을 붙잡고 버스편을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참 뒤 간신히 알아낸 결과 버스는 하루에 두편, 시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침 일찍과 오후 늦은 시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버스는 제가 묵던 호텔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 연결 교통이 너무 안 좋고, 늦은 오후 버스는 위험한 지역에서 밤에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택시를 대절해서 가는 게 낫겠다고 결정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김군과 동행한 홍아무개 목사님도 매우 어렵게 알아내어 아침 일찍 서둘러 가지안텝에서 버스를 타고 킬리스로 갔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튿날 아침 저는 택시기사와 흥정을 하여 (기억나기에는) 현지 화폐 80리라(약 4만원)를 주고 킬리스로 향했습니다.
위험지역이라 일부러 점잖게 생긴 택시기사를 선택했지만 영어를 못하여, 우린 간단한 단어와 몸짓으로 최소한의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저는 며칠 뒤 가지안텝을 떠나면서 이 택시기사를 다시 마주쳤지요. 우연히 말입니다.
오토만제국 시절의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가지안텝의 시가지를 지나자 높은 구릉이 보이고 구릉지대 정상에는 콘도가 새로이 들어서고 있더군요. 이곳 신주거지는 아마도 가지안텝의 중산층을 위한 보금자리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신도시를 지나자 헐벗은 구릉과 산지가 보이는데 오랜 동안 양과 염소를 방목하여서인지 나무는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더 달리다 보니 도로는 산에서 바로 급경사로 이어지며 광활한 평원이 나타나고 마침내 우측에는 킬리스가 보입니다. 11월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건조하고 태양이 작렬해 더웠습니다.
저는 혼잣말로 ‘지중해가 있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산지에 부딪혀 푄현상을 일으켜 건조한 기후가 되는 걸 거야’ 하는 순간 택시는 어느덧 킬리스시 외곽도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좌측에 대형 이슬람사원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저는 이슬람세계를 여행하면 늘 사원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는 버릇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게 보내는 눈빛으로 위험도를 막연히 추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킬리스 사원의 사람들 눈빛이 별로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택시는 어느덧 시내로 들어서는데 햇빛이 잘 드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테리아가 있는 호텔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MerTur호텔입니다. 김군과 홍 목사가 묵었던 호텔입니다.
저는 ‘아, 저 카페의 테라스쪽에 앉아있으면 스파이, 밀입국브로커, IS대원들을 쉽게 만나겠구나’ 하고 본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 하고 투숙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거절당했습니다. 호텔 직원은 “방이 없다”는 말 한마디로 저의 투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군화에 카고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한눈에도 용병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저를 투숙시켰다고 혹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호텔을 나와서 통관을 기다리는 트럭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길로 달리니 국경사무소와 이민국 난민캠프 입구가 보입니다.
차에서 내리자 주변의 눈길이 제게 쏟아집니다. 적의에 찬 눈빛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저를 태우고 온 택시기사는 겁에 질려서 차를 이동시키고 있더군요. 저는 택시를 향해 기다리라고 소리쳤습니다. 더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택시에 올라타서 떠나려고 택시 옆에 바싹 몸을 붙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자리에서 불과 2~3초 머물고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군부대 초병이 제지하며 다가오길래 몇 컷 더 찍고 얼른 몸을 차에 실었습니다.
국경 주변에는 키 작은 올리브나무가 많습니다. 국경너머 시리아까지 올리브나무 경작지가 이어져 있고 군데군데 오렌지나무도 보입니다. 차를 돌려 가지엔텝으로 가면서 우측에 보이던 올리브나무와 가시덤불이 있던 곳이 아마도 김군이 시리아 입국을 시도한 지역이 아닌가 지금 생각이 듭니다.
며칠 후 저는 김군과 비슷한 나이의 시리아 청년을 만났습니다. 터키의 길거리에서 모욕에 찬 언사를 들으며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떨고 있는 그를 별로 도와주지는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가 할 수 있던 건 그의 아픔을 가슴으로 안아주고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말 ‘엄마’와 비슷한 ‘마마’라는 말을 뱉으며 처음엔 흐느끼다 마침내 엉엉 울어댔습니다.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한국의 청년들이 군대에 입대해 흘리는 눈물은 엄마에게 바쳐지는 눈물입니다. 김군도 그럴 것입니다. 희망은 엄마밖에 없습니다.
추신=분쟁지역만 골라 여행하는 제게 남들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상 반대편에 전한 제 마음이 다시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되돌아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김군과 비슷한 나이의 시리아 난민청년이 저를 오히려 위로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와 나눈 온정의 느낌이 아직도 제게 전해옵니다. 김군도 지옥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에 의해 반드시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부모된 입장으로 너무 안타깝습니다~그가 살아서 꼭 무사히 부모 품으로 돌아오길 외교부차원에서라도 계속노력하셔서 꼭 찿아서 살려주시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