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분쟁지역여행기 ②]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꽃뱀, 그리고 조지아로···
[아시아엔=이신석 분쟁지역 순회특파원] 박영희씨는 예레반에서 가장 오래 체류한 한국교민이다. 우리 나이로 26세인 그녀는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다. 영어 러시아어 아르메니아 구사에 거침이 없다.
그는 “얼마 전까지 3명의 교민이 살다가, 선교사 부부 2쌍이 이주해 와 지금은 7명의 한국인이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인접국 조지아에는 한국교민이 90명 이상 살고 있다”며 “얼마 전 무슬림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서 한국선교사를 추방해 선교사 가족 50여명이 합류하면서 그렇게 늘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아르메니아에 오면 늘 궁금한 것이 ‘아르메니아인들은 도대체 생계수단이 무엇일까?’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상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국에 투자를 아끼지 않기에 그렇다”였다. 오래된 아르메니아 친구 다니엘(본명 28세)은 어느 날 갑자기 바를 개업하고 독일제 차량을 몰고 다녔다.
“어디서 창업자금이 생겼냐”고 물으니, 그는 “미국계 아르메니아인이 투자하여 현재 바가 성업중”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다니엘이 개업한 바에서 시리아 아르메니아인인 아다르가 바텐더로 일하고 있어, 그녀로부터 어느 정도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딜 가도 생산기반은 전혀 보이지 않고, 에너지 생산도 거의 전무하기에 나의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까?’ 궁금하던 찰나에 필자는 다소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알리스는 우연히 들른 레스토랑에서 만난 여인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내게 아기가 있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폰을 뒤져 이름 모를 한국인 아기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한다. 한국 아이의 눈이 길게 찢어진 모습이 너무 귀엽다나. 사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후 아이돌이나 한국 드라마 영향으로 아르메니아에서는 한국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이 매우 좋다.
오랜 시간 길에서 머물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전개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만나니 실소만 나온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락처를 주고 받은 다음날부터,?그녀의 구애가 시작된다. 아,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나 싶다. 소싯적에는 나름 여성편력이 제법 화려했기에 이런 류의 유혹에는 끄덕도 안하는 필자지만, 내게 없는 아이를 낳아준다니? 가만 생각해보면 ‘하늘의 뜻이고 삼신할미가 내가 가여워 아이를 내려 주시나 보다’라고 하룻밤을 뒤척인 다음 날,?메신저로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좀 어려우니 돈 좀 부쳐달라”고. 바로 이런 것이 그들의 생계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올해로 100년째 되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기억하자”는 추모식이 아르메니아뿐 아니라 전 세계 아르메니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열린다고 한다. 필자는 대학살의 진위 여부보다는 1992년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에서 자행된 아르메니아 군인과 민병대의 아제르자이잔 민간인 인종청소를 먼저 거론하고 싶다. 아르메니아 학살 이전에 그들이 자행한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대한 책임과 사과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아르메니아를 떠날 때가 된 거야.”
다음 행선지는 조지아.
조지아 트빌리시로 이튿날 이동하여 예의 이리나의 집에 여장을 풀고 다시 해후한 조지아 소년 기오르기에게 아이팟을 선물한다. 며칠간 머물고 이제는 가족처럼 지내게 된 그들과 헤어지는 날, 기요르기는 참다못해 눈물을 터뜨린다. 그를 다신 만날 때에는 청년이 되어있을 것이다.
이리나의 두 딸 케티와 타코는 내가 시리아 근방으로 간다고 하니 많이들 걱정해 준다.
“그래 안녕!” 야경만큼은 파리에 뒤지지 않을 조지아 트빌리시로 이제 떠난다.
매우 충격적이네요. 아르메니아 여자가 저에게도 말을 걸어오던데, 역시 나라가 가난해서 여자들이 이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