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분쟁지역 여행기 ①] 아르메니아서 만난 엄홍길
아르메니아 150만 난민, 내전과 IS 피해 시리아서 방황
[아시아엔=아르메니아/이신석 순회특파원]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1990년대 초반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 공급이 끊겨 석기시대로 돌아간 과거가 있다. 특히 수도 예레반은 겨우내 땔감 부족으로 집안의 가구, 문짝, 창문틀을 뜯어내어 난방을 해야 했다.
필자가 처음 아르메니아를 방문 했을 당시, 도시는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온전한 빌딩은 물론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모습이었다. 인터넷은 물론 식수, 하수처리 등이며 여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재래식 화장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대신 물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렴하여 이웃나라 조지아와 더불어 배낭여행자에게는 저렴한 숙소, 식대, 교통비 그리고 나이트라이프는 오랜 여정에 지친 여행객들에겐 오아시스 그 자체였다.
그러나 2013년 러시아와 FTA(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이후 살인적인 물가 폭등으로 서민의 삶은 각박해지고, 미처 적응하지 못한 중년 이후 세대는 그저 예전의 향수에 젖을 뿐이다.
수년 만에 방문한 필자에게 갑자기 오른 물가는 적응키도 어렵고, 이제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최근 시리아에서 ‘시리아 아르메니안’이 전쟁을 피해 150만명이 밀려들어 경기가 호전되리라는 기대를 갖지만 어느 날 그들은 썰물 빠지듯이 고국 땅에서 빠져 나가게 된다.
올해로 1백년째가 되는 터키의 아르메니안 학살이 있던 당시에, 무자비한 터키군의 학살을 피하여 수많은 아르메니아안은 시리아 북부도시 알레포에 터전을 잡고 재산을 모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최근 내전과 IS의 기독교인 학살을 피해서 모국 아르메니아로 귀국했지만 200만 인구가 밀집한 수도 예레반에 150만의 시리아 아르메니안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여타 유럽국가로 떠돌고 있다.
한국에서 서방매체의 뉴스에 의존하던 필자로서는 시리아에 그렇게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곳 아르메니아에 오고서야 알게 되었다. 서방언론과 주변국에겐 불편한 사실일 뿐이리라.
아르메니아에 체류하는 한국인 3명 가운데 박영희란 분이 있다. 박씨는 내게 자신이 그동안 겪은 얘기를 정말 소상히 들려줬다. 먼저 자신이 임대하여 사는 집의 주인한테 생긴 일이란다.
주인의 친척인 시리아 아르메니안이 어느 날 전쟁의 포화를 피하여 왔는데, 다니엘(가명)은 가족을 이끌고 고향 아르메니아로 탈출 당시에 국경 부근에서 보안군에게 잡혀 처참하게 구타당하고 소지한 돈을 모두 빼앗겼다. 부인은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길에서 팔아가며 천신만고 끝에 다니엘 가족은 아르메니아에 도달했다. 온몸이 부설질 듯 아파 병원에 가니 늑골과 팔이 골절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물론 국경지역에서 구타당한 탓이다. 그들은 도시의 가장 밑바닥 생활도 마다지 않았다. 여느 시리아 아르메니아인처럼 고학력의 그들이 버티기엔 너무나 힘든 일상이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그들은 유럽으로 떠났다.
박씨는 내게 여러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그 중에 컴퓨터 전공을 한 아다르(가명)는 영어, 아르메니아어, 러시아어, 시리아어,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청년이다. 그는 예레반의 조그만 바(주점)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자신은 시리아 내전 당시 정부편에 가담하여 반정부군 및 IS와 전투를 했지만 더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고국으로 망명을 결심했다고 한다.
필자는 매일 밤 바에 들려 그의 거칠었던 무용담을 듣고 현지정보를 얻게 된다. 그는 “시리아 근처에 가면 무조건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쪽으로 접근하라”고 간곡히 거듭거듭 당부했다. 그가 말하는 시아파는 현 정부를 이끌고 있는 시아파 계열의 알아사위를 말한다. 즉 아사드 현 대통령이 장악한 지역을 지칭한다. 레바논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도 시아파인 현 정권에 적극 협조하며 시리아 내전에 참전하고 있다.
시아파는 수니파보다는 외부인에게 덜 위험하다는 설명이다. 아다르는 필자에게 거듭 당부한다. “미스터 리, 시리아 시아파 지역쪽으로 접근하되, 인접한 난민촌은 시아파에 쫓겨난 강경 수니파입니다. 시아쪽으로 접근하면 수니파 난민을 만나게 되고, 수니파쪽으로 접근하면 시아파 난민을 만나게 되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필자로서는 위험을 피할 길이 없게 된 셈이다.
오랜 세월 내전 상태의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예레반에 일자리를 구하러 온 35살 제이콥(본명)은 종교의 용광로같은 레바논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필자를 만난 날 바텐더 보조로 첫 출근을 하였다며 자신이 일하는 재즈바에 초대했다. 필자는 이에 응해 재즈 연주를 하는 재즈 바에 들려 20살 나이에 아랑곳 않고 우정을 나눴다. 제이콥은 “레바논 내에 시리아 난민캠프에 가려면 시아파 난민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당부한다.
그는 “절대로 수니파가 득세하는 난민촌에는 가지 말라”며 “그들에게 (필자같은) 저널리스트를 납치하여 파는 행위는 너무 쉬운 일(fuxx easy)”라며 거친 표현을 한다.
이스라엘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9년째 여행을 하고 있다는 야엘(가명)은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내게 보여줬다. “유명한 한국인 아니냐”면서. 산악인 엄홍길씨였다. 야엘은 “엄홍길씨를 만난 것이 내게는 무척 영광이었다”고 연신 싱글벙글했다. 여행매니아는 어디서나 한 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 역시 아시아기자협회(아자) 홍보대사로 봉사하고 있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을 아자 행사에서 두어 차례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 야엘이 너무 반가왔다. 엄 대장은 는 해외에서 가는 곳마다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현지인에게 종종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반가움도 잠시, 나는 야엘의 이 한마디에 소름이 끼쳐왔다. “시리아 내전 당시 골란고원에 캠핑을 할 때였어요. 갑자기 우르릉 쾅쾅, 쾅쾅 하는 굉음이 계속 되는 겁니다. 무슨 컴퓨터 게임인 양 눈앞 시리아 영토에 탱크가 왔다갔다 하며 전투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내가 사는 세상에서, 그것도 바로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필자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나도 조금 놀랐다. 그래, 내가 갈 길이 바로 그곳인데, 예서 멈출 수는 없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