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킬리스 르포 (완)] ‘김군 같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500유로뿐이었다
[아시아엔=이신석 분쟁지역여행가] 지난해 11월 초순 이란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터키 동부도시 반(Van)은 영하의 날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사람들을 가득 태운 ‘돌무쉬’(마이크로버스)가 이란 국경에서 점차 멀어지자, 차 속의 여인들은 하나둘 히잡을 벗기 시작했다. 자유를 만끽하는 여인들의 미소짓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터키를 20여 차례 오가며 웬만한 곳은 가봤지만 이번 여행은 특별했다. 터키-시리아 국경에서 탈출한 난민
을 만나 내 마음을 전하려 왔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터키 동부지역에선 쿠르드족의 독립투쟁이 있었다. 이 일대는 ‘분쟁지역’ 이미지로 인해 여행객들 발길이 뜸했다. 그런 만큼 주민들은 가끔 마주치는 여행자에게 최고의 호의와 친절을 베풀었다.
이후 터키정부가 쿠르드반군 문제를 해결하면서 ‘안전 여행지’로 탈바꿈했지만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내겐 오히려 매력을 잃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시리아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이곳에 정착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는 한국 출발 전부터 맘이 설렜다.
나는 터미널에 도착해 가지안텝(Gaziantep)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반 여행객처럼 산르우르파(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 출생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리아 난민캠프에 가서 그들을 만나는 게 목표였다. 그곳은 터키 <지한통신사>의 시나씨 알파고 서울특파원이 추천해줬다.
밤길을 달려 이른 아침 가지안텝에 도착했다. 시장골목에 들어선 찻집에 들어가 인상 좋은 찻집 주인과 얘기를 나눴다. 그는 “최근 터키정부가 100만명 넘는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으며 불법체류 난민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며 “그들은 부랑자로 떠돌고 있다”고 했다.
가지안텝에서 하루를 머문 나는 이튿날 택시를 전세 내 국경지역인 킬리스를 향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택시기사는 내게 담배를 권했다. 택시는 가지안텝 외곽을 벗어나 엊그제 이란에서와는 달리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광야 끝으로 달려갔다. 건조하고 따가운 날씨 탓일까? 갈증이 나고 입술이 타들어간다.
한참 달리니 멀리 터키-시리아 국경이 눈에 들어온다. 국경도시 킬리스에서는 불과 5분 거리다. 시리아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오랜 기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땅에, 지금은 이슬람국가(IS)가 똬리를 틀고 세력을 확장하며 온세계를 경악에 빠뜨리고 있다.
이곳 국경에서 시리아 북부 도시 알레포(Alepo)까지는 두시간 정도 걸린다. 알레포는 아직 IS에게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지역은 이미 그들 수중에 떨어졌다고 한다.
마침내 킬리스에 도착했다. 지난 1월10일 김아무개(18)군이 실종돼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바로 그곳이다. 멀리 출입국사무소와 터키쪽 이민국과 난민캠프가 보인다. 이쪽 터키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지만, 군화를 신고 카메라를 멘 내게 적의에 찬 눈빛을 보낸다. 군 보안요원들은 내게 이 지역을 어서 떠나라고 재촉한다. 그때 절름거리며 걷는 청년 둘이 눈에 띄었다. 시리아 내전 희생자들이다. 택시기사는 “슈리아(시리아의 터키어 발음) 포탄에 의해 다쳐서 저렇게 됐다”고 했다.
호텔이 보였다. 김군이 묵었다던 메르투르호텔이었다. 테라스가 딸린 카페가 있어, 며칠 묵으며 난민 정보도 듣고 사람들 만나기도 좋을 듯해 카운터로 갔다. 긴 설명도 없이 “방이 없다”는 얘기만 들어야 했다. 택시를 되돌려 국경에서 1km 정도 지났을까? 기사가 지붕을 수리하는 빌딩을 가리킨다. IS 폭격으로 파괴된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 뉴스에서 IS쪽에서 유탄이 날라오자 터키군이 보복하려고 포탄 수백발을 쏘아 피해를 입은 그 건물인 듯했다.
여기까지 왔다가 난민캠프에도 들어가지 못하다니. 사람들을 붙잡고 다시 물었다. “일반인들은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매우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란 말만 되풀이 들어야 했다.
포기하기로 했다. 너무 아쉬웠지만 할 수 없이 가지안텝을 통해 이스탄불로 갈 수밖에 없다. 가지안텝 버스터미널에서 이스탄불행 승차권을 예매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터키 과자 귀네페를 몇 봉투 샀다. 버스를 기다리며 상념에 젖어있는데 그들이 나타났다. 바로 시리아 난민 청년들이다. 그들은 터미널에 빈자리가 많은데도 최소한의 안전이라도 보장 받으려는 듯 경찰부스 앞에서 쭈그려 눈치만 보고 있다. 시리아 난민들은 터키 현지인 접촉을 꺼려한다. 자기들 때문에 터키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사실을 매스컴이나 눈치로 이미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인인 나를 발견하고는 재미있다는 듯 연신 말을 붙인다.
그리고 단답형 문답이 오갔다. “어디로들 가니?” “친척집에 가요.” “담배 가져라.” “안 피워요.” “친척집 가서 드려.” “네, 고맙습니다.”
그들은 알레포 출신이라고 했다. 가지안텝에서 불과 두시간 거리. 그러나 그들은 알레포에서 가지안텝까지 1주일 걸려서 왔다고 했다.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IS 검문소를 피해서 숨죽이며 조금씩 이동해왔다고 한다.
광야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굴은 벗겨지고 새까맣게 탄 모습들이다. 버스가 곧 도착한다. 그들과 작별하고 1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내 안 어디에선가 오열이 일어나고 평상시 안하는 욕이 튀어나온다. “개XX들, 니XX X발”
뛰어가 그들을 불러세우고는 바지 벨트를 풀러 바지 안쪽 지퍼를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 친구들아” 벨트 안쪽 지퍼를 내리면 현금을 보관하는 나만의 금고가 있다. 분쟁지역의 열악한 숙소에 묵게 되면 늘 도난 위험이 있다. 오랜 노하우다. 얼추 2700유로 남았을 것이다. 이 가운데 1500유로를 꺼내 그들 3명에게 공평하게 500유로씩 나눠주니 받지 않는다.
“이건 내가 주는 게 아니야. 모든 게 알라의 뜻이야. 내 눈을 봐! 내 진심으로 건네는 우정이야. 너희들이 기꺼이 받아 주면 고맙겠어.” 마지못해 현금을 받는 때를 놓치지 않고 뒤도 안돌아보고 게이트를 통과하여 밤버스에 올랐다.
돈을 나눠주면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더 아프고 시리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가장 낮은 차원의 위로가 아니던가?
지난 며칠을 되돌아 보니 맘이 다시 무거워진다. 애초 시리아 난민캠프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시리아 알레포에도 다녀오려고 했는데…
난민캠프 접근도 못 하고, 평지에 위치해 사진촬영조차 못했다. 시리아의 알레포로 가는 길을 가이드 하는 브로커들은 이중삼중의 정보원들이다. 그들은 돈 되는 거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결국 나는 포기해야만 했다. 외국인인 나를 IS에 팔아넘길 수 있다는 충고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강대국과 주변국의 대리전에 어린이, 부녀자 할 것 없이 참수되는 전쟁터에 나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력감만 몰려온다.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하고 혼자 차를 마시는데 행색이 비루하고 여기저기 눈치를 보던 청년이 합석해도 되냐 묻는다. 그도 시리아 난민이다. 18살 시리아 청년, 아니 소년이다.
김군과 같은 나이다.
그 역시 시리아 알레포를 떠나 10여일 광야를 지나 터키에 왔다고 했다. 손톱 밑에는 때가 잔뜩 끼어 있다. 손등에는 하트모양 문신이 조악하게 새겨 있다.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며 하트가 이 소녀에게 바치는 거라며 키키댄다. 소년과 얘기 나누는데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터키 중년남성이 목에 잔뜩 힘을 주면 소년에게 시리아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소년은 겁을 먹고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하지 않고 소년과 대화를 잇는데 이 터키 친구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나는 겁먹고 있는 소년을 안심시키고 부릅뜬 눈으로 소리쳤다. “너 경찰이야?” 하니 그가 내 눈을 째려본다. 더 화난 표정으로 눈을 마주보며 몸을 일으키니 내 큰 덩치를 확인했는지 슬그머니 사라진다.
소년이 여동생 사진을 보여준다. 어리다.
“동생은 어딨니?” “알레포에서 할머니네요. 지금 시간에는 자고 있을 거예요.” 소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엄마는? 마마는 어딨어? 마마, 엄마는 어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어머니란 단어 앞에서는 비교가 될 수없듯 마마(엄마)란 말을 듣자 소년은 이제껏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다. “마마는 이스탄불에서 일하고 있는데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소년은 시리아 알레포에서 가지앤탭으로 와 임시체류 허가를 받고 몇 년간 못 본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돼지만도 못한 놈!’ 나라 잃고 떠도는 시리아 소년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소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 주머니를 뒤지니 70유로가 나온다. 소년은 안 받는다. “네 아버지뻘이고 그러니 받아도 돼. 맛있는 거 사먹어. 그냥 내 마음이야.” 그는 다른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로 나보다 앞서 떠났다. ‘그것밖에 못줘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하며 그를 보낸다.
이스탄불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게 남아있던 시리아 난민들 목소리가 그 두달 뒤 ‘김군 실종 사건’ 이후 내게 환영처럼 다시 들려온다. “이제 시리아는 끝난 나라야.” 맞다. 자기 국민들 못 돌보는 나라가 무슨 나라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