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의 화폐 탐구] 몽골 ‘투그릭’ 지폐 속 두 영웅, 칭기스칸과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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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아시아엔> 객원기자] 옛 공산권 국가 중 제일 신기한 나라는 몽골일 것이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는 1990년 평화적인 혁명으로 무너졌지만, 몽골을 70년 가까이 단일정당으로 다스려온 몽골인민당은 1996년까지 집권했다.

1996년 이후 국회는 몽골인민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다수당을 차지했다. 몽골인민당이 대통령궁을 마지막 떠난 것이 2009년이다. 민주당 출신 서양 유학파인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가 2009년 대통령선거에서 몽골인민당 엥흐바야르 대통령을 제치고 당선된 이후, 2012년 총선에서 국회 권력마저 몽골인민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국회와 대통령을 같은 정당에서 차지하면서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 필자가 관심 갖는 것은 수도 울란바토르 한 가운데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의 이름이 ‘칭기즈 광장’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2016년 여름 실시된 총선에서 몽골인민당이 다시 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면서, 칭기즈 광장을 본래의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바꾸겠다는 주장이 다수당에서 나왔다. 광장의 이름이 칭기즈, 그대로 남을 것인지 수흐바타르로 변경할 것인지 최근 몽골에서 핫 이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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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수흐바타르와 칭기즈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인가?

10투그릭에서 100투그릭에 이르는 몽골 화폐 앞면에 초상화가 실린 담딘 수흐바타르나 500투그릭부터 20000투그릭까지 담겨 있는 칭기즈칸도 몽골의 ‘민족 아버지’다. 물론 민족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달랐다. 민족 영웅을 넘어선 민족 아버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두 인물을 통해 풀어보자.

필자는 한 민족이 역사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할 때, 아니면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고 역사 무대에서 사라질 뻔하다가 다시 독립과 자유를 얻을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민족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칭기즈칸은 몽골민족을 처음으로 역사무대에 오르게 한 지도자이고, 담딘 수흐바타르는 중국의 지배를 받은 몽골족을 독립국가로 만든 영웅이다.

몽골이라는 말은 7~8세기 중국자료에 나온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현재 몽골의 동북부 지역에 부족들끼리 살았다. 몽골인들이 부족끼리 서로 싸우다 보니, 몽골초원은 중국의 뒤뜰과 같은 지경이 됐다. 이는 중국이 직접 몽골초원을 다스리지 않아도, 마음껏 간섭할 정도로 몽골 사람들에 비해 우세했다는 의미다.

중국에 의해 ‘오랑캐’로 불리던 몽골이 元 제국을 세운 것은 칭기즈칸 때였다. 당시 몽골 사람들이 아무리 칼을 잘 쓰는 강한 민족이긴 해도, ‘외교’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몽골 부족들끼리 통합도 없고, 심지어 같은 부족 내에서도 충돌이 심했다.

칭기스칸은 뛰어난 전쟁수행 능력 외에 외교적인 수완도 만만치 않았다. 1206년 몽골 초원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민족들을 몽골 중심으로 통일시키고 부족연방제를 구성했다. 이 지역의 유일한 지도자가 된 칭기스칸은 다음 차례로 중국을 정복해 나갔다. 중국의 서하에서 시작한 칭기스칸의 세계패권 전략은 성공했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로마제국을 넘어 역사상 영토가 제일 넓은 나라가 되었다.

칭기스칸이 몽골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는 강한 제국의 후손들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독특한 몽골문화를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한몫 한다. 독특한 몽골문화란 무엇인가? 그는 몽골 사람들을 위한 문자와 법을 만들었다. 칭기스칸은 몽골 사람들의 정신적인 해방을 위해 문자와 법의 필요성을 느꼈다. 오늘날 몽골은 800년 전 칭기스칸의 신념과 시각에 의해 재편된 자신들의 세계를 이어받은 사람들의 국가인 셈이다.

칭기스칸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세계적으로 웬만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담딘 수흐바타르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다시 800년 전으로 돌아가 신해혁명까지의 역사구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칭기스칸의 사망 이후 몽골제국은 손자 세대에 네 지역으로 분할됐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제국의 중국 지역을 1260년 ‘원’이라고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몽골 사람들의 중국 지배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원 나라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 칸 즉, 원의 혜종이 1370년경 명나라의 초대 황제 홍무제의 공격에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고 북경을 버리고 현재의 몽골 지역으로 피신 가면서, 몽골 사람들의 후퇴가 시작했다.

그 후 청의 제6대 건륭제가 1758년 몽골 지역을 모두 정복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완전히 중국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됐다. 특히 몽골은 청에 의해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단됐다. 몽골 사람들의 이러한 퇴진은 1900년대까지 계속했다.

몽골 사람들은 칭기스칸의 종교인 샤머니즘을 숭상하다 원 때부터 티베트의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1869년 태어난 한 아이는 잡증담바 호특트(1869~1924년, 재위 1911~1924년)라는 이름으로 몽골의 새로운 종교 지도자로 올랐다. 원래 티베트 사람인 그는 어린 나이에 외몽골에 가서 신해혁명까지 열심히 활동했다. 1911년까지 어느 정도 인맥을 쌓은 이 사람이, 독립파 지인이나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서 외몽골 지역에서 복드 칸 국을 선포하고, 복드 칸이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만일 몽골 사람들이 복드 칸을 통해 다시 해방을 맞았다면, 담딘 수흐바타르가 무슨 일을 했길래, 화폐 위에 복드 칸이 아니고, 수흐바타르가 실려 있는 것인가?

복드 칸 국은 신정국가로 출발했다. 복드 칸이 종교인 출신이다 보니 강력한 결단을 내리지 못 했다. 신해혁명 얼마 지나, 중국이 다시 외몽골 지역으로 침입했다. 동시에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에서 피신 간, 멸망한 러시아 제국의 엣 군부세력이 신생 몽골 국가인 복드 칸 국의 정권을 빼앗으려 작전을 펴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독립을 잃을 뻔한 몽골을 바로 담딘 수흐바타르가 살린 것이다.

군인 출신인 수흐바타르는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를 접했다. 복드 칸에서 어린 시절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활동을 했던 그는 중국과 러시아 틈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몽골의 자유를 찾기 위해 공산주의를 하나의 수단으로 본 것이다. 몽골의 총사령관에 오른 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몽골 영토에 있던 러시아 제국의 옛 군부세력과 중화민국으로 새로 출발한 중국의 군대를 추방하고 1921년 공산주의혁명을 일으켰다.

수흐바타르의 뛰어난 전쟁 수행능력과 외교 마인드가 없었다면 몽골은 중화민국 지배에 남았거나, 제국주의 러시아 군부의 지배를 오랜 동안 받았을 것이다. 정치에 욕심이 크게 없던 그는 대통령이나 총리에 오르지 않다가 혁명 2년 후 장군 명칭을 간직한 채 서거했다. 현대 몽골을 건국함으로써 역사무대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몽골을 부활시킨 수흐바타르는 현대 몽골의 국부이자, 민족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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