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르노카라바흐 르포··· IS뿌리 곳곳 남아 “자유가 그리웠다”

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정교수도원의 몫을 다하였던 다디방크 수도원. 인종학살이 지나고 간 자리에 오스트리아인 거드와 현지인 로베르토의 굽은 어깨가 그날의 처참함을 대변한다, 산너머는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수비대가 자리하고 있다.

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정교수도원의 몫을 다하였던 다디방크 수도원. 인종학살이 지나고 간 자리에 오스트리아인 거드와 현지인 로베르토의 굽은 어깨가 그날의 처참함을 대변한다, 산너머는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수비대가 자리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의 고층아파트. 주변의 쓰레기더미가 이 도시의 황폐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의 고층아파트. 주변의 쓰레기더미가 이 도시의 황폐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시아엔=이신석 분쟁지역여행가] 구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아제르바이잔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는 많은 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다. 그들의 독립을 지원하는 정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와 이슬람을 믿는 아제르바이잔 간의 갈등이 일어 마침내 국가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1990년대 초반 막을 내린 전쟁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아제르바이잔은 구소비에트 시절 석유 시추와 관련된 공병 출신들이 주력이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숫자는 적었지만 보병 출신이 대부분이어서 전투력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이에 불리한 전력을 극복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내무장관은 무자헤딘과 접촉하여 체첸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 무자헤딘 용병을 전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승기를 뒤엎기는 쉽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빼앗고 승리하기에 이른다.

실례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슈시에서 벌어진 도시전투에서 무자헤딘이 슈시를 탈환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반격하는 아르메니아에게 무지헤딘 300여명을 남겨두고 아제르바이군 모두가 줄행랑쳤다.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탈레반에게 밀린 무자헤딘은 이후 보스니아 내전에도 참전했다가 훗날 체첸 전쟁에 투입되어 러시아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후 체첸 반군은 러시아의 용병으로 탈바꿈해, 2008년 그루지아 침공시 러시아군의 선두에 서서 수도 트빌리시 외곽의 고리(스탈린 출생지)까지 진출하게된다. 현재는 동우크라이나 내전의 용병으로, 그리고 시리아 내 IS에 합류 되어있는 그들이다.

수차례 지진으로 파괴된 후 복원중인 아르메니아 귬리(Gyumry) 대성당.

수차례 지진으로 파괴된 후 복원중인 아르메니아 귬리(Gyumry) 대성당.

종교·민족·정치 얘기는 절대 금물
전쟁 중 인종청소를 구실로 방화·약탈·살인·강간·학살을 일삼았던 지역은 서로 상대방의 종교와 민족을 혐오한다. 따라서 현지 방문 때는 종교와 민족과 관련된 대화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현재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인정하는 나라는 전 세계 국가 중 유일하게 우루과이가 유일하다. 카프카즈지역에 종교·민족 갈등을 유발해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러시아의 입김 탓에 국제사회는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유고연방 보스니아와 더불어 유럽에서는 각종 매스컴에 연일 카라바흐공화국의 전쟁이 뉴스에 올랐지만 한국 언론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비자가 여권에 있으면 아제르바이잔 입국이 불허된다. 이스라엘 입국 스탬프가 있으면 이슬람 국가를 여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르메니아 남부 도시 카판(Kapan)의 버스매표소.

아르메니아 남부 도시 카판(Kapan)의 버스매표소.

편의시설 부족, 민박 예약 ‘필수’
항공편은 이용하기 힘들고 버스로 수도 스테파나케르트에 닿을 수 있으나 현지 여행시 대중교통으로는 불가능하고 전세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여행 시 민족, 종교, 정치 얘기는 극도로 삼가야 하는데, 자칫하면 매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나라 전체가 산악으로 둘러싸여 여름에는 피서에 좋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고립되는 지역도 있다. 숙박은 여행자로서는 구하기 힘드니 예레반에서 미리 민박을 예약해야 하고 호텔은 거의 없으니 유념해야 한다.
언어는 아르메니아어와 러시아어가 통용되며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레스토랑도 별로 없고 찾기도 무척 힘들다.

카라바흐 공회국 수도 스테파나케르트는 남카프카즈 산맥의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다. 필자가 도착한 11월은 안개가 걷히는 날이 드물고 비가 많이 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 표정은 경직되어 있고 차갑다. 스테파나케르트는 큰 대로 하나를 두고 상가와 주택들이 늘어선 형태로, 곳곳에 가벼운 무장을 한 경찰들이 지키고 있어 겁나기도 한다. 물론 그들 때문에 치안문제는 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행정관저가 몰려 있는 중심으로 이동하며 보니 경찰이 10m 간격으로 2인1조 짝을 이뤄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대통령궁은 촬영이 금지되고 국회의사당은 경찰에게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하루 동안 너무 긴장하여 민박집에서 일찍 쉬기로 하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분쟁지역을 주로 여행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거드’라는 이름을 가진 서른다섯 미혼의 친구가 동행이 돼주었다. 서로의 여행 무용담에 밤이 깊어 간다. 아프가니스탄 살랑그패스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여행길에서 만났던 탈레반 민병대와 무자헤딘 얘기로 새벽이 돼서야 잠을 이룬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여정이 무탈하기를 빌며 어느새 꿈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도시와 거주지는 10월이 되면 안개에 갇힌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안개는 그들의 잔학했던 전쟁과 그로 인해 변해 버린 추악한 인간의 삶을 일거에 감춰버린다.

다디방크 수도원 인근의 전적비에서 그날의 전투에 참가했던 현지인과 필자.

다디방크 수도원 인근의 전적비에서 그날의 전투에 참가했던 현지인과 필자.

오스트리아 나그네와 밤샘 무용담
그렇다. 그들은 이방인인 내게 치부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난 그들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들만 보고 돌아가는 여느 관광객들처럼 오래된 기독교 초기교회와 조악한 물건이 드문드문 놓여 있는 박물관에나 가야 할 것이다.

수도 스테파나케르트 중심에 있는 박물관은 공화국이 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당위성을 부여받기 위해 조악한 물건을 드문드문 전시해 놓았다. 들어가서 사진을 몇장 찍었지만, 역시나 진본을 의심케 하는 고서적과 청동기 유물들이 널려 있었다. 난 이런 곳이 싫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청동기 시대 유물이라는 박물관의 조악한 유물들을 떨쳐버리고 다른 박물관 입구에 닿았는데 여긴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플라스틱 욕조에 담긴 썩은 빗물과 낙엽들이 체르노빌을 연상시킨다.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니 좀 분위기가 이상하다. 여긴 박믈관이 아니다. 모든 게 부족한 이곳에서 골동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취미거늘, 집 주인은 오랜 세월 골동품 수집에 많은 시간을 쏟았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부족한 공간은 호두, 배, 감 등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치장을 했다.

이곳을 꾸민 주인이 궁금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여 인생을 거의 다 허비한 사람 말이다.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이고 나랑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잘 통할 것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수집하는 앤틱 가구나 소품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시화와 핵가족 탄생으로 필요했던 도시형 가구와 소품이 주류를 이룬다. 그렇다 보니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서유럽에서나 발견할 수 있고, 대부분 농노 신분이었던 러시아 농촌에서는 이런 물건조차 구경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 정도 물건이면 굉장한 안목과 수집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슈샤 뒷골목의 개인박물관

슈샤 뒷골목의 개인박물관

슈샤 뒷골목의 개인박물관

슈샤 뒷골목의 개인박물관

이것은 위의 밑이 뚫린 역피라미드형 돌에 물을 붓고 한나절 지나면 바닥부터 정제된 물이 차오른다. 그들은 ‘광천수’라 부르며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드디어 이곳 주인장을 만났다. 미리 짐작한 대로 그는 나를 보고 한 눈에 친구임을 직감한다. 그는 내게 커피와 과일을 내주며 자기 얘기를 한다. 그는 “어릴 적 이곳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타타르계 여인을 만났다”고 했다. 그녀와 아이를 낳고 키우다 이혼하고 두번째 결혼을 러시아계 여성과 했다가 또 이혼했다고 한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서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선대의 집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와 혼자 살고 있다. 예전 소비에트연방 시절에는 자유로이 이곳저곳 왕래했는데, 이제는 여러 나라로 쪼개져서 갈 수 없다며 안타까워 했다.

커피와 과일을 얻어 먹고 뭔가 사례를 해야 하는데, 그에게 돈을 건네는 것은 드문드문 찾아오는 여타 관람객들과 다름 없고, 이미 우리는 마음 속 깊이 친구가 되었기에 난 그에게 준비해간 아이팟을 선물로 건넸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의 집안에 가득한 앤틱과 소품을 정리하는 모습이 오버랩됐기에 선뜻 내 정성을 건넬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다며,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고 질문을 퍼붓는다.

대충 사용법을 일러주고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넨다.

“난 당신이 모은 아름다운 수집품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에 묻혀 사는 모습은, 그전보다 더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 있어 친구!”

그가 따라 나오며 손님을 위한 방을 보여주며 내년 여름에 여기 와서 묵으라며 말을 붙인다.그렇다. 그는 헤어지기 싫은 거다. “나도 그래.”

슈샤 개인박물관의 주인(왼쪽)과 필자

슈샤 개인박물관의 주인(왼쪽)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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