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 터키 지즈레,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Day 4: ‘쿠르드의 땅’ 이딜은 폭풍전야

[아시아엔=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전문기자]

전쟁과 포르노

밤새 긴장과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흘리다가 더욱 명료해지는 어릴 적 기억들이 되살아나 결국 오열을 터뜨리기를 반복하다가 나도 모르게 야한 영상을 접하게 되고 마음이 느긋해졌다. 미군사병들이 월남전에서 마리화나와 LSD, 그리고 포르노에 취했던 이유를 십분 이해 할 즈음 날이 밝아 오고 있다.

잠을 못 자서 내일로 미룰까 하는 생각은 비가 오는 바깥 날씨 덕에 사라졌다.

필자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추운 계절을 택했고, 이렇게 비가 오면 빗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그들은 더욱 고통스러울 터. 수면부족로 인해 위급한 상황에 대처가 늦어지지 않도록 기자는 심신을 곧추세우리라 다짐한다.

HDP PKK YDG-H를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HDP PKK YDG-H를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HDP PKK YDG-H
HDP는 쿠르드계 인민당으로 현재 터키 의회에 진출하여 550석중 59석을 차지하는 성과를 보인 정당이나, 터키 정부는?테러의 배후라 지목하고 있다.

PKK는 쿠르드인민노동자당으로, 19년째 투옥중인 압둘라 오잘란이 그 우두머리다.?터키동부와 이라크 북부에 걸쳐있는 주디산맥을 근거지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서방국가와 터키는 이들을 테러리스트 단체라 규정지었다.

YDG-H는?도시에 거주하는 쿠르드족 애국청년들의 모임인데, 현지인들은 PKK라 통칭한다. 이 두 단체는 PKK가 깊은 산속, YDG-H가 도시가 주무대인 것을 제외하곤 유사하다. 기자는 이들 단체를 서술할 때 PKK라 통칭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아침을 때우고 지즈레(Cizre)로 향하는 버스편을 알아보니 지즈레는 열리지 않고 이딜(Idil)까지만 운행한다고 하니 일단 이딜로 가기로 결정하고 몸을 싣는다.

이딜로 향하는 길은 돌이 너무 많아서 농사가 부적합한 구릉지대이며 쿠르드족 답게 주로 목축을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쫓겨나서 척박한 대지에 이르러 감자대기근으로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죽어가고, 아사를 피하고자 신대륙으로 떠났던 아이리쉬와 쿠르드족이 오버랩되며 구릉을 지날 즈음이었다.

검문소를 통과 하는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살기 어린, 온몸을 검은 전술복과 안면마스크로 위장한 이들이 다가온다. 러시아 특수부대 알파를 연상시키는 그들이 나에게 덮쳐 온다.?그동안 수많은 살기를 느껴봤지만 이런 류의 적대적 살기를 느껴본 적이 없기에 공포에 휩싸인 지루한 시간이 계속된다.

기자의 여권과 동행한 현지인의 신분증을 검사하는 동안 차 안의 승객들은 바짝 긴장한 채 얼어 붙어있었다. 마치 도저히?저항할 수 없는 절대권력 앞에 불려간 느낌이었다.?쿠르드족 사람들이 매번 “터키 군경은 너무나도 나쁘다”고 얘기하던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검문소를 통과하고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군경이 사납게 검문했던 이유는 이틀전 YDG-H 즉 쿠르드족 청년들의 공격으로 검문소가 박살나고 터키 경찰 2명이 부상당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외 이딜에서 찍은 엽기적인 모습의 복제양. 전쟁을 앞둔 그들 처지를 대변해주는듯 하다.
그외 이딜에서 찍은 엽기적인 모습의 복제양. 전쟁을 앞둔 그들 처지를 대변해주는듯 하다.

이딜 시내 풍경
2008년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침공했을 당시 기자는 수도 트빌리시에 있었다. 각 가정의 티비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실시간 전쟁소식에 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절규했다.

이방인을 향한 눈빛은 살기가 가득했고 기자는 수없는 욕설과 광기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었다.

돈과 소지품을 강탈, 도난 당했다. 내 얼굴은 현지인이 뱉은 침으로 범벅이 됐고, 길거리에서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택시기사에게 권총으로 협박당하고, 칼을 목에 들이대며 죽일 듯 달려들었다. 당시 기자는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아르메니아로 피신을 했었다.

그러나 며칠?후면 도시가 봉쇄되고 전쟁에 돌입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지금의 이딜은 그루지와와는 달랐다.

세기말(Apocalypse)을 대하는 순박하고 신실한 무슬림 쿠르드족은 몇몇을 제외하면 이방인을 대접하는 이슬람의 기본을 잊지 않았다. 폭력은 없었으며 도난 강탈도 없었다.

기자가 차이를 마시는데 누군가가 슬그머니 옆에 앉는다. 소름이 확 끼친다. 이럴 때는 둘 중에 하나의 경우인데, 간단히 말하면 아군 아니면 적이다.

적군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던가 아니면 웃으면서 우회적인 화법으로 넌지시 메시지를 던지는데, 이때 절대로 즉각 반응을 보이면 안된다. 곧바로?이해하지 못한 티가 나면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주위를 슬그머니 돌아보니 찻집 주인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살짝 보낸 눈빛은 긴장하라는 무언의 메시지. 장년의 무리들만 앉아있는 찻집에 젊은 청년이 들어와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는 건 분명히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는 상상이 펼쳐진다.

절대 예단은 금물이다. 섣부른 예단은 죽음과도 직결되기에. 이윽고 기자의 직업 등을 그가 물어왔고, 시간이 지나자 그에게서 본론이 나온다.

“3일후 여기 이딜은 봉쇄되고, 우리는 싸울 것이다. 여기 우리들의 삶은 너무나 힘들다. 100여년 전부터 터키는 쿠르드족 민족말살, 즉 인종청소(Genocide)를 하고 있다.”

필자가 “당신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고 말하며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그가 손가락을 올리는데 그 의미를 모르고 찍으려 하니 그가 강하게 몸으로 거부했다.?나는 “미안하다 손짓의 의미를 몰랐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던 찻집주인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보인다.

찻집주인이 주시하고 놀란다는 것은 이 젊은 친구가 제법 알려진 친구란 의미이다. 그렇다. 이 젊은 친구는 PKK 즉 YDG-H 대원인 것이다.

하키가 이딜에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한사코 말리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앉은 내내 줄곧 우정을 나누었다.(사내자식들은 눈빛만 봐도 안다)

그는 내가 쿠르드족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했고, 난 그가 어떻게 해서든지?이 더러운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길 원했으니 이보다 더한 우정은 없으리라.

잠시 후 그가 일어서고 우린 격렬한 포옹과 뺨을 번갈아?맞추고 헤어지니 찻집주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마도 그는 PKK의 지역 간부쯤 되었으리라.

개와 늑대의 시간
시리아에서 IS와 전쟁을 벌이는 쿠르드족 병사는 페쉬메르가라 불린다.?페쉬메르가는 민족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홀연히 일어나 민족을 지키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PKK와 YDG-H는 어찌보면 페쉬메르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탄압받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에.

쿠르드족 청년들은 터키의 특수부대와 전쟁을 벌이는데 이들의 표정과 체격을 보면 비슷하면서 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

전장에 투입된 터키군은 엄선되었기에 체격이 더 크고 화가 나면 화기가 얼굴에 그대로 보이는 특징이 있고 몸이 두툼하여 누가봐도 힘이 장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살기가 밖으로 그대로 느껴진다.

반면에 YDG-H는 터키 특수부대보다 몸은 작고?가냘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날카롭고, 주로 구릉과 산지에서 뛰어 다녀서 그런지 기동전에 매우 능숙해 보인다. 터키군보다 가볍지만 그 스피드와 야전에 필요한 만큼의 근육은 절대로 얕보지 못할 존재임에 틀림 없으리라.

터키군이 화난 표정과 살기가 겉으로 그대로 드러난다면, 쿠르드족은 갈무리 되어있는 표정일지라도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잔인함이 더해질 것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느리지만 강한 턱과 큰 몸집의 사자가 터키군이라면, 놀랄만한 스피드로 협동해 사냥을 하는 머리 좋은 아프리카 들개 즉 리카온은 쿠르드족 PKK라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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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를 앞둔 이딜
뒷골목은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 PKK, YDG-H, HDP와 PKK리더 압둘라 오잘란을 옹호하는 낙서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제는 숙연히 파괴만을 기다리고 있는 뒷골목 전경이 쓸쓸히 남아있을 뿐이다.

철시중인 시장과 은행에서 서둘러 돈을 인출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즈레에서 밀려난 젊은 청년들은 이곳 이딜 청년들과 합세하여 더욱 거세게 항전의지를 불태울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터키 동남부 실로피 지즈레에서 시작된 저항은 시르낙주를 벗어나 인근 마르딘과 디야르바키르주 등지로 확산되리라고 추측한다.

이미 실로피 지즐레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가 저항이다. 이미 쫓겨나고 피난 온 시민들은 비교적 안전지대인 이곳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정부군을 향한 저항과 항전의 불씨를 더욱 거세게 불태울 것이다.

이미 터키 당국도 확산일로에 놓인 이 이슈에 대한 우려와 대책마련에 급급하지만, 극우 민심을 결집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하려는 에르도안 정부는 당분간 폭압과 인종청소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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