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 터키 지즈레,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Day 9: 가장 가난한 곳이 가장 극렬히 저항했다
[아시아엔=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
Day 9
아침부터 다짜고짜 누사빈 평화촉구 시위현장에서 만난 여기자가 자신을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메신저로 닥달한다. 잠시 기다리라고 메시지를 보내고서는 사진을 찾아 가장 잘 나온 사진을 보내주었다. 더불어 기자가 찍은 시위현장 사진까지 동료애를 발휘하여 보내주었다. 내가?경찰서에 잡혀 갔던 얘기를 하니, 자신도 사진기자 겸 운전하는 동행과 같이 잡혀가서 12시간 동안 취조를 받았다고 한다.
시위 당일 대대적인 경찰의 작전망에 걸려들었구나 싶어서 혹시 인터뷰가 가능한지?물었더니 메시지를 안 보는 척 안 읽은 척 상태로 놔둔다.
집을 잃고 형편이 어려워진 보통의 지즈레 난민을 만나면 기자와 악수하고 포옹하며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남녀노소를 떠나 기자에게 온힘과 정성을 실어준다. 하지만?쿠르드 스카프를 두르고 시위에 참가한 쿠르드족 여기자는 자신의 사진만 얻고 이후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기가 찬다.
음지와 양지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을 위해 또는 완전한 자치권을 위해서 어떤 이는 산악게릴라나 도시게릴라로,?혹은?정치적인 헌신을 거듭한다. 하지만 2년 전 <아시아엔>에도 실렸던 한 쿠르드인은 알고보니 엉뚱하게도 에르도안 당시 총리의 추종자라고 지즈레 난민들은 입을 모은다.
하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직업의 본분조차 잊는 사람이고, 비슷한 하나는 자신의 안전과 영달을 위해 추한 민낯을 서슴 없이 드러낸다. 더욱이 기자는 그들에게는 외국인이니 꺼리낌 없는 행동을 해도 동족들이 저간의 사정을 모를 것이란 계산이 깔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처세술과 영민한 두뇌회전에?칭찬을 해도 부족할 따름이다.
내부의 적은 이 더러운 전쟁을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
동네 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서 하릴 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순간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들어온다.?나도 모르게 아는 척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앉아도 되냐며 묻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다.?그들은 역시 지즈레에서 빠져나온 이들이었다.
한명은 변호사, 다른 한명은 보육교사라고 소개한다.?변호사는 처음으로 만나는 유창한 영어의 소유자라서 오랜만에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에 따라?정보도 꽤 얻었다. 이딜에서 오다가 만난 영어교사는 다소 부족한 영어 구사를 해 아쉬웠던 터에 반가웠다.
기자는 이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터키인들을 만나지만 아직도 그 옛날의 영화로왔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향수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언론매체에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십중팔구 우물안 개구리 같은 국가관과 민족관 그리고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기자는 이런 상황이 외국어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충분히 배웠는데도?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결국 외신을 접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자국의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정보를 얻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영어 구사자를 만나면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영어를 이해하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맹목적이고 획일화된?정부의 희생양이 아닌 적어도 자신의 주관을 논리있게 펼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무하멧은 비록 자신이 개업한지 얼마 안된 변호사이지만 인맥이 있으니 만약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적극 돕겠다며 힘을 보태준다. 여타 인권후진국을 다니며 길에서 만난 제법 힘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문제 생기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네는 일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지만, 지즈레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자의 마음을 읽은 그 역시 진심으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지즈레에서 가장 열악하고 못사는 동네가 어디냐고 물었다. 지즈레에 들어가게 되면 제일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 아이들과 아픔을 같이 하고프기에 그랬다.?보육선생은 자신이 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지명을 알려준다.?그가 붙인 말이 내 귓가에 찡하게 남는다. “가장 못 살고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으며 가장 많이 파괴되었고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순간 나는 넋을 잃었다. 독립군과 그의 가족은 가장 못살고 가장 강렬하게 저항했으며 가장 많이 파괴된 삶을 살았노라는 환청이 들린다.
오랜만에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이들과 만나 소중한 정보를 얻었지만 사실 이 카페에 들른 이유는 따로 있다. 지난밤 저녁을 빵으로 때우려는 기자가 제과점에 들렀더니 나이 든 나를 극진한 마음으로 대한 한 소녀가 생각나?후원받은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품을 들고 가니 오늘은 오프라고 다른 종업원이 이야기한다.
카페의 그녀는 올해 18살로 제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터키인도 쿠르드인도 아닌 아랍계다. 어릴 적 친구들은 이 지긋지긋한 시골 소도시를 떠나 자신은 친구가 없다고 한다.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에 오고 싶다고 간절히 얘기하는데 가족 상황을 물어보니 놀랍게도 14남매 중 끝무렵의 딸이란다. 도시를 떠나 대도시로 가고 싶은데 엄마가 “우리는 한 식구이니 모두 같이 살아야 한다”며 허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통 무슬림의 가족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자의 느낌이 착잡하다.
어린 그녀는 애기처럼 기자에게 응석부리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는데 여기는 무슬림 지역이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난 그녀 앞에 심드렁한 표정을 애써 지으며 주변인들의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밤새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하다가 후원물품중에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야상자켓과 여성용 시계를 갖고 들렀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아쉽다.
후원해주신 물품을 갖고 있다가 성심을 다하여 드리는 순간은 늘 찰나다. 항상 긴장하고 겸허한 자세가 아니면 그 찰나를 매번 놓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