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 터키 지즈레,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Day 11: “터키정부는 쿠르드 지역 발전을 원치 않는다”
[아시아엔=이신석 분쟁지역전문기자]
Day 11
오늘은 심한 갈등과 테러 그리고 각국의 테러리스트와 스파이가 암약하는 누사빈을 거쳐서 실로피로 향하게 된다.
가는 도중 온천수가 솟는 것이 보이는데 지친 심신을 온천에 녹이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온천으로 개발되지 않고 버려진 상태라 불가능하겠지만.
누사빈은 며칠 전 기자가 경찰에게 심하게 당했던 도시라 알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지만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로 남아있다.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한 첫 걸음.
누사빈에 도착하니 공교롭게도 며칠 전 잡혀갔던 그 자리에 내려준다. 불과 10m 거리에 갈아타야 할 실로피행 버스가 있는데 또 경찰은 열린 문 사이로 까딱까딱 손가락을 내밀며 내게 오라고 한다. 진절머리 나는 이 나라 경찰들…
신분증을 달라고 하더니 여권을 받아들고 한 놈(이제 놈이라 부르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은 가방을 수색한다. 기자가 아직 젊었던 시절인 1992년, 우즈베키스탄에 여행갔다 호텔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나이트클럽에 입장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우즈벡 경찰은 툭하면 금전을 요구하거나 툭툭 치며 여행객을 괴롭혔는데 그 짧은 거리에 두어 무리의 경찰들이 깔려 있었기에 엄두를 못냈었다.
여기 터키 경찰은 지나치다 못해서 너무 한다 싶다. 마음을 달리 먹었다. 질문에 건성 대답하고 잡아가려면 잡아가라 이번엔 취조실에서 지난번 만난 너희 동료형사들하고 파티라도 해야겠다는 심산으로 배짱 튕기며 시건방지게 굴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본부에 전화를 한다. 아쉽게도(?) 그쪽에서 나를 위한 파티는 한번으로 족한 듯 싶었다. 뭐라 뭐라 하더니 심드렁해진 놈들은 기자를 놓아주고, 나는 돌아서며?두 놈에게 속으로 욕을 했다.
오토부스(예전에는 돌무시라 표현을 했는데 요즘엔 미니버스를 오토부스라고 부른다)를 타고 실로피로 향하는데 아이들이 동양인에게 관심 갖는 표정을 보인다. 미리 챙겨둔 학용품 등 후원 물품을 건넸다. 시르낙(Sirnak)에 사는 소녀는 PKK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포함한 지역의 학교들에 폭탄 테러를 해서 너무 무섭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 지역의 치안은 많이 불안한 듯하다.
시리아 쿠르디스탄으로 향하는 물류운송 트럭들이 한줄도 아니고 세줄로 약 20여 km 줄지어 검문 통과를 기다리기에 무슨일이 있나 알아보니, 15km 앞에 있는 지즈레에서 문제가 생겨 이곳에서 차량들을 미리 통제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기자는 국경 및 검문 통과 때문에?늘어선 트럭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카메라에 담았다.
헌병들이 늘어선 차량 사이를 계속해서 검문 수색하기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가방에 카메라를 넣어 둔다. 덕분에 특경대 헌병 군인 특수부대가 지키는 각각의 검문소를 현지인처럼 위장 은닉하고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지즈레 관문에 설치된 검문소만 남았다.
지즈레 근방의 낯익은 산악 지형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울컥한다. 2년전 그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날 도로에서 목숨을 걸고 질주하는 이들이 떠오른다.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게 바이크를 타던 쿠르드 청년들을 보며 그들의 억눌린 울분을 느끼고 있던 즈음, 서로에게 게이라고 놀리면서 짖궂게 굴던 중년의 무리들이 기자를 그들만의 피크닉에 초대했다.
음주가무 후 서로 늘어서서 전통쿠르드 군무를 즐기는 대열에 기자도 합류했었다. 유쾌하고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지즈레 사내들에게 기자는 매료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진한 우정을 쌓았다. 그들은 터키 여타 도시의 쿠르드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러나 멋진 기억은 2년 전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지금 지즈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2015년부터 자치권을 위해 거칠게 저항하던 그들은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고 원치않는 학살의 현장에 서게 됐다. 한국에 있던 기자는 연일 들려오는 그들의 다급한 메시지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한국에서 술을 늦게까지 마시고 홀로 귀가하는 시간이 되면 그들의 안타까운 소식에 슬퍼하고 분노하기를 거듭 하다가, 드디어 오늘 친구들과 뛰어 놀던 뒷동산에 이르게 되었다. 가슴 깊숙히 울컥 올라오는 반가움과 슬픔이 교차한다.
드디어 지즈레 시내가 보이고 검문소가 보인다. 개인 렌탈차량이면 사진촬영이 가능하나 버스에서는 승객들 모두가 위험할 수 있다.?승객 중 정부쪽 사람들이 끼어있어 고발당하면 고초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촬영은 못했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검문소를 보자 ‘내가 통과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자꾸만 든다. 여기까지 은닉과 천운으로 가까스로 통과 했지만 저 철통같은 경계는 자신이 없었다. 잘못하면 스파이로 오인받아 고초를 당하리라. 검문소 통과를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기자는 늘어선 대기선에서 하차하여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반대편으로 가는 차량을 히치하이킹 위해서…그런데 갑자기 군경 합동이 된 검문소에서?나를 오라고 손짓한다. 그 주변을 둘러보니 엄폐된 바리케이드에서 병사들이 기자를 조준하고 있고 건너편 버스와 차량 안 사람들은?전쟁터에서 늘상 보아온 장면처럼 여기며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가자 일정거리 앞에 멈추라고 한다.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하는 즉시 탄환이 내 몸을 관통할 것이다. 병사들은 실전을 많이 치룬 듯 살기도, 온화함도 없는 표정으로 기자가 헛된 몸짓을 보이면 바로 사살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아뿔사! 드디어 전쟁터에 왔구나.
나도 모르게 두손을 하늘 높이 든다. 그들이 다가와 가방을 열고 소지품을 확인한다.?몸수색을 하는 동안 나를 겨눈 병사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눈은 자비도 분노도 없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눈빛, 즉 실전을 치루는 군인의 그것이다. 순간 기자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쓰러질 뻔했다.?가까스로 지탱하고 소변이 느껴지는 것을 억지로 참는다.
그들의 수색과 여권 대조가 끝나자 기자를 반대편으로 가는 차에 태워 검문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주라고 지시한다. 십년 감수…
정신을 얼추 찾아갈 무렵 차 안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두 남자에게 시선이 간다.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정보요원으로 느껴진다. 흡연천국 터키에서 얻어탄 차량임에도 담배냄새 대신 사내의 깔끔하게 면도된 뒷 턱선 너머의 무스크향이 진동한다. 무스크향은 그들의 직업과 사상을 가늠케 한다. 기자는 그들에게 트럭휴게소에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아침부터 전날의 위통 때문에 굶었던 배를 채우고 원기를 얻기 위해 끼니를 때운다. 대중교통이 없으므로 히치하이킹을 시도한다. 히치하이킹의 단점은 끝까지 태워준 운전자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거다.
이번에 얻어 탄 차량 주인은 아스팔트 타르 관련 엔지니어다.?29살이며 아직 싱글임을 극구 강조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지나며 그간 속에 담아왔던 질문을 해봤다. “바로 건너편 시리아는 유전 개발을 하는데 이쪽 터키에서는 왜 개발을 안 하냐”고. 기자가 원하는 대답이 바로 날아온다. “터키정부는 쿠르드 지역 개발로 인한 쿠르드 지역의 발전과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농사에 문외한인 필자가 봐도 아무 씨앗이나 뿌려도 풍성한 수확을 얻으리라 예상되는 기름진 평원 밑에는 어마어마하게 매장된 원유가 있으나 현실은 그냥 버려진 땅에 불과하다. 이를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류문명의 기원이라는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내 현실적인 계산으로 바뀐다.
지즈레로 향하는 루트 중 두곳은?막혔다. 이내 머리 속에 지즈레로 향하는 길들이 떠오른다. 만약 종이에 그려서 연구하다 들키면 이를 트집잡아 스파이로 몰릴 터. 머리 속에서 수없는 루트와 가능성을 따져본다. 경계 정도, 검문소 위치 등등…머리가 터질 듯 복잡해진다.
현지 지형과 도로상황에 익숙한 군경의 감시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불가능하다고 결론 났다. 기자가 바라는 건 요행일 뿐이리라. 하지만 전사에 기록된 요행들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고 있기에 포기하지는 말자고 마음 먹는다.
몇번의 군경 검문을 거친 후 호텔로 돌아온 필자는 또다시 복통에 시달리다 어느덧 잠이 든다. 이날 지즈레에서 하루 동안 터키군의 공격으로 쿠르드 애국청년 25명이 사망했고 35명 중상을 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