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쿠르드 어머니’ 파티마의 60 평생 한많은 삶

내전 피해 고향 지즈레서 100km 떨어진 미드얏서 생 마감한 ‘국내 난민’

고 파티마 에롤 ‘쿠르드의 어머니’

[아시아엔=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 필자는 터키 동남부의 이라크 및 시리아 접경지역으로 전쟁 중인 지즈레(Cizre) 지역에 접근하기 위해, 작년 1월 중순 이곳에서 서쪽으로 100km쯤 떨어진 미드얏(Midyat)에 일주일 가량 머문 적이 있다.

최근 페이스북을 서치하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미드얏에서 머물 때 신세를 진 자나(28)의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파티마 에롤(Fatima Erol) 나이는 60살 정도다. 나는 그녀가 숨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작년초 만났을 때도 파티마의 눈엔 눈꼽이 끼고 병색이 보였는데, 1년 반을 못 넘기고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녀는 ‘쿠르드 어머니’다. 지즈레에서 태어나 갖은 고초와 전쟁을 몸으로 겪으며 6남매를 키워냈다.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 쿠르드어로 Partiya Karker?n Kurdistan)와 터키 정부군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를 피해 2015년 말, 고향 지즈레에서 250리 떨어진 미드얏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녀의 늘그막 삶은 타향살이 설움으로 덮여 있었다. 지즈레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연관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60년 뿌리 내리고 살아온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그 삶은 도대체 뭔가? 난민은 해외로 떠도는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국내 난민이란 말이 과연 이런 것인가?’

고향 지즈레에서 소박하게 살다가 삶의 터전을 잃고 미드얏으로 피난 온 그녀는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 셋이 장성해 나름 성공한 축이어서 조그만 빌라라도 세 내어 10명의 손자들까지 대가족을 이루고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3대가 한 공간에 거주하며 전통적인 무슬림 가부장 중심의 삶을 이끄는 모습은 40, 50년 전 우리네 대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녀는 수시로 나의 안전을 걱정해주며 식사도 여러 번 마련해줬다. 그녀가 차려준 전통 쿠르드 아침과 돌마 요리의 깊은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얼마나 따스하게 나를 대하든지, 처음 그녀와의 만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엔지오에서 일하는 막내 하키와 도착한 나를 보자 그녀는 이틀간 기내 宿泊과 공항노숙으로 냄새가 진동하는 나를 온갖 예의와 정성으로 대해줬다. 전통 이슬람 방식 그대로 말이다.

나도 감사하는 마음에 답례로 파티마의 아들 며느라와 손자·손녀들에게 한국에서 지인들이 후원해준 선물더미를 아낌없이 풀었다.

파티마의 딸들에게는 파스텔, 둘째 아들에겐 컴팩 노트북, 막내딸에게는 예쁜 구두를 선물했다. 닌텐도 장난감은 큰아들에게, 반짝이 구두와 백은 며느리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내 친구인 막내에겐 랜턴을 전했다.

그녀의 손자들에겐 학용품을 나눠줬다. 장난감 인형도 어린 아이들에게 전했다. 자녀와 손자들이 내가 전하는 조그만 정성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흐뭇해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에게 핫백을 드렸다. 그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 미안했다. ‘이분들이 조금 더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런데 작년 2월 중순 귀국 후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내가 드렸던 모든 물품을 모아서 가난으로 피난 나오지 못한 지즈레 고향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는 것이다.

파티마의 아들(왼쪽)과 손자손녀들

천국의 사람들은, 늘 지옥에 사는가 보다.

파티마는 고향을 등지고 온 난민. 나는 2015년 말 킬리스 지역에서 IS 지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 한국인 김모 군을 찾아나선 이방인. 수만리 이역 땅 한국에서 온 이방인은 쿠르드난민의 따스한 밥상을 서너 차례 받으며 客愁를 풀 수 있었고 그것은 바로 파티마의 정성이었다.

지난해 터키군경에게 체포되기 직전,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녀는 눈에 눈꼽이 자꾸 생겨 연신 눈을 닦는 것이었다. 그지없이 안타깝기만 했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니···.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난민으로 지내는 동안 잠시나마 힘든 삶을 잊고 가족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있던 시간을···. 온 방안이 환호로 가득찼던 그때를···.

그녀의 소식을 들으며 내 눈에선 눈물이 뚝 떨어졌다. 지금 나는 그때 그곳의 쿠르드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

덧붙임:나는 그녀와 헤어진 보름쯤 뒤인 작년 2월 초 쿠르드족 PKK의 근거지인 하카리(Hakkari)에 들어갔다 터키군경에 체포돼 혹독하게 당하고 강제 출국당했다. 터키정부는 파티마의 무덤을 찾고, 그녀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 내게 입국을 과연 허가할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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