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쿠르드분쟁지역 억류기③] “쿠르드테러 협조자, 당신은 여기서 못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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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글·사진/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 조사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또 다른 건물에 이르자 대원들은 나를 이끌고 3층으로 데려갔다. 가슴은 진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강하게 압박되며 심한 두통이 찾아온다.

내 머리에 계속해서 맴도는 말은 첫번째 지하 취조실에서 대질이 끝나자 나를 감시하던 어린 대원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 같은데, 왜 테러리스트에 협조했지? 이제 당신은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어졌어요, 안타깝네요.”

그가 펼쳐놓은 모니터에는 내 조서가 포토샵을 이용해서 잘 꾸며져 있었다. 강압적으로 스마트폰의 비밀번호를 열게 하여 다운받은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폭격으로 부서진 쿠르드의 도시들, 터키인에게는 원수이자 테러리스트로 보이는 쿠르드족 친구들과 어울려 찍은 사진, 안면마스크로 위장한 PKK 대원들의 사진 등등. 내 조서의 첫 장면만 보아도 나는 영락없는 테러리스트 협조자로 보였다. 조서는 내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항변도 저항도 무의미해지는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십수년 전부터 내가 하는 행동 즉 세계의 오지와 분쟁지역을 다니며 내 몸에 걸친 모든 위선을 벗어던지듯이 가진 모든 걸 나눠주고 알몸이 되다시피해 돌아다녔다. 내가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무지’ 속에서 살아왔고, 나는 늘 불확실한 미래와 이상 속에서 고민해왔다.

분쟁지역은 항상 미지의 세계였고 나의 무지함은 번번히 거리에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였다. 책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고, 피아를 구별 못하는 혼돈은 나를 늘 혼자 있게 만들었다. 알고리즘과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분쟁지역이다. 그래서 나의 대화는 늘 신과의 대화였다.

불확실한 한치의 미래는 나만의 방법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그마저 불확실한 나의 무지를 드러내기 십상이지만 말이다. 그러면 마음 속 깊은 곳의 또 다른 내가 이렇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어릴 적부터 바라던 게 이런 모습 아니었어?” “네 한번이라도 무지와 불확실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냐고 묻고 싶어.” 그랬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앞으로 내가 글을 쓰면 모두 경험한 바를 쓰고 나만의 언어로 쓰겠다고 ‘무지와 불확실’에 충성맹세를 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건물 3층에 오른 나는 취조실로 끌려 들어갔다. 여태까지 겁을 잔뜩 주며 압송하던 대원 3명은 내 조서와 병원진단서가 첨부된 파일을 사무실의 대원에게 건네고 서로 사인을 주고받는다. 여긴 또 어딘가? 떠나는 3명에게 나는 악수를 건네며 수고했다고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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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전역에서 마주치는 시리아난민 어린이들. 이들은 잘 훈련된 것처럼 카메라를 들이대자 포즈를 취해준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어김없이 사진 찍는 댓가를 요구했다.?

난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당신이 나를 때리든, 수치를 주든, 고문을 하든 그게 당신 잘못이겠는가. 나의 이런 우호적인 제스처가 훗날 그들의 폭력에 굴복한 마치 스톡홀름신드롬 같은 내 비굴함에 울며 떨지언정, 난 너희들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웃으며 친구가 되자는 건 내 마지막 남은 폭력에 대한 저항쯤이라 생각해두자.

 

인수를 받은 조사관은 아주 친절히 대한다. 차도 권하고 담배도 권하고 영어도 제법 해서 원만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난 그에게 묻고 싶던 질문을 던진다.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테러리스트가 아닌데…”

그가 대답했다. “맞다. 당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조사가 더 필요하다.”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건 나를 변호할 수 있다는 기회가 다시 생겼다는 뜻이다. 격동에 겨워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참았던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가 알았다는 듯 대원 하나를 더 데리고 화장실로 나를 안내한다.

9시간 동안 소변을 보지 못했지만 뇨의(尿意)를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화장실에 이르자 예상대로 샛노란 소변이 내 몸을 빠져나간다. 너무 피곤하고 지쳤나 보다. 그들이 이끄는 휴게 겸 흡연실로 사용하는 곳에 데려가더니. 아르펜이라는 이름의 대원이 내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내가 취조에 잘 응해주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투의 말과 눈빛을 건넨다.

사무실로 돌아와 좀 정신이 들자,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빠르게 해본다. 앙카라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을 할까? 과연 그들 영사들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질문이나 던져보자 하고 아르펜에게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을 해도 되냐”고 묻자 그는 “조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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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슬림의 전통인 ‘관용’에 매달리고자 죽을힘을 다 했다, 사진은 시아파 최대축제인 아슈라 기간에 이란에서

만약 그렇다면 내가 테러리스트 또는 그 협조자로 조서가 꾸며져 결론이 난다면 대사관에 연락해봐야 “테러리스트 협조자로 시인을 하셨으니 저희가 해드릴 별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답이 영사에게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대사관에 미리 연락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들에게 진실로 대하고 그들의 진심을 이끌어 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 머릿속에 나온다. 벼랑끝에 섰다는 마음이 들자 나도 모르게 온몸의 땀으로 속옷이 적셔져옴이 느껴진다.

시간은 밤 11시를 가리킨다. 내가 특수부대원들에게 포로로 잡힌 지 12시간이 되어갔다. 그들은 “오늘은 여기서 마치자”며 모니터를 끈다. 이제 유치장으로 데려가나 했더니, 그는 나를 같은 층의 상황실에 데리고 간다.

야간 상황실은 10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이 두개 있고 각각의 책상에는 모니터가 두대씩 배치되어 있다. 그 앞에 의자가 다섯개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책상 뒤로 창문이 있다. 창밖을 보니 달빛이 이 서러운 산간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산에 남아있는 잔설은 내 서러움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30여 시간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나 배고픔보다는 내가 있어야 할 상황실에 야간 당직근무자와 근무교대를 위해 몰려드는 수많은 대원들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신을 곧추세우고 우호적인 제스처만이 나를 여기에서 살아남게 만들리라는 생각뿐이었다. 훗날이 있다면 어쩌면 내 비겁한 제스처가 두고두고 나에게 고통과 자학을 안겨주겠지만 말이다.

모두들 허리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차고, 때론 소총으로 무장한 그들 앞에서는 자비를 구하는 불쌍한 모습보다 당당하게 웃고 친근감을 표하고, 그들보다 나이 많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강인한 모습이 나아 보이리라. 총이라는 절대폭력 앞에 비굴해지는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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