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분쟁지여행] 아제르바이잔의 ‘타지마할’ 모스크


내 여행의 즐거움은 아침식사에 항상 먹다 남은 빵에 치즈와 버터를 듬뿍 발라 갖고다니다가 배고파 보이는 아이들을 만나면 기꺼이 내어 주는 것이다.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발길로 차이고 돌팔매질 당하는 이 지역의 개들에게 베푸는 작은 사랑이다. 녀석을 보니 새끼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젖꼭지가 부풀어 올라있어 갖고 있던 빵을 모조리 녀석에게 몰아주었다. 욕심 많은 덩치 큰 수놈들 몰아내기가 여의치 않자 동행인 거드가 나서서 수놈들을 쫓아내고 그 사이 빵을 먹였지만 상당한 양임에도 불구하고 더 달라는 애원의 눈빛을 아련하다. 어쩌랴 부디 건강을 추스리기 바란다, 아이야.

Nagornokarabakh sushi에서

Shusha 또는 shushi라고 표기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도시에 와서 박물관에 들렀다. 또 내 이상한 버릇이 나오기 시작한다. 박물관에는 조악하고 믿겨지지 않는 청동기시대 유물과 1992년 발생한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전쟁때 사진 몇장과 복사본이 전부다. 위 사진은 1차세계대전 즈음 터키에 대항한 이 지역 투사들로 보인다.

나는 시니컬해져 설명에도 집중하지 않고 하릴없이 홀을 오간다.

그러다가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한다. 체 게바라가 아닌가?

그의 길을 따라서 아바나에 정착하던 10여년 전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저 사람이 체 게바라 아니냐고 물으니 박물관 직원이 우리의 친구라고 한다. 나이 열여덟에 여기를 방문했다고 한다. 속으로 ‘아니 이런 거짓말을?’ 내뱉었다. 체는 1967년 사망한 걸로 아는데 속으로 당신은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거늘. 자세히 저 사진을 보니 AK74 돌격소총을 든 모습이다. 즉 1974년 이후의 사진이다. 저 사진은 자세히 보니 체를 무척이나 닮은 아르메니아의 군인일 뿐인데, 내가 순간 착각하여 물어본 질문에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네?

박물관 직원이 맞는가 의심스럽고 분위기 망칠까봐 내색은 않고 입구로 나와 방명록을 뒤지며 혹 한국인이 다녀간 흔적을 찾아본다.

잠시 후 박물관 직원 둘과 동행인 거드가 같이 나오며 방명록을 훑어보는 나를 보고는 전쟁 때 장교로 참전한 키 큰 직원이 “아마도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으로 방문한 듯 싶다”고 말한다. 아까 거짓말 하던 싸로라는 이름을 가진 직원은 나에게 첫 방문의 영광을 주고 싶지 않은 듯 몇 명의 한국인이 방문한 적이 있다고 얘기한다. 얘기가 끝날 즈음 조소를 잊지 않고 그에게 보낸다. “거짓말쟁이 아르메니안, 빠삐용이 싫어하던 아르메니안!”

1992년 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아제르바이잔군 군수물 창고.

나는 폭격으로 무너진 가잔체소츠(Ghazanchetsots) 성당을 보기로 거드와 의기투합했다. 거드는 매부리코에 작달막하고 배불뚝이에 두꺼비처럼 크고 쳐진 눈을 가진 싸로와 연신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키가 큰, 배려가 몸에 밴 직원과 작별인사를 하고 등을 돌린다.

전쟁 때 이슬람을 믿는 적국 아제르바이잔의 군수물 창고로 쓰이고 끝내 파괴되었다가 현재 복구된 Ghazanchetsots성당과 바로 옆 Belt tower 모습.

위에 엉성해 보이는 건물은 아르메니안 싸로의 거짓말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내가 엉성하게 찍은 모스크 전경. 뒤늦게 Govhar agha mosque라 불리는 이곳 이슬람 예배당이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에게는 인도의 타지마할 이상으로 아름다움을 갖춘 모스크라는 사실을 알고는 망연자실했다.

싸로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기분도 그래서 식료품점에 들렀다. 이곳에선 레스토랑은 찾을 수 없다. 못 사는 터키의 시골이라도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길거리 카페는 있거늘 여기는 식재료와 주류 등 잡화를 파는 가게만 줄줄이 있을 뿐이다.

맥주 한병으로 간단하게 길에서 요기거리를 찾다가 앙증맞게 귀여운 병아리를 진열대에서 발견했다. 매우 정중하게 “이거 파는 물건 맞냐”고 물으니 주인여자는 인상을 팍 쓴다.

과거 앤틱 장사 시절 구소련 연방국가에 앤틱가구와 소품을 구하러 갔다가 소장 가치가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집에 있는 물건을 파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며 팔지 않아 오랜 사회주의로 인하여 자본주의를 이해 못하는구나 생각하며 하나도 못 사고 돌아섰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길 위에서 여행자가 물어보면 항상 거짓말을 하고 약속이나 신의는 전혀 지키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해치는 행위가 아닌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하긴 그러니 내가 여기에 왔지, 화가 치밀지만 돌아서 가게를 나온다. 나와서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데 거드가 한마디 한다.

“토니! 오늘 싸로에게서 초대 받았어. 그 집으로 가자고.”

안개는 점점 짙어오고 싸로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비포장의 연속이고 러시아가 자랑하는 싸고 튼튼한 LADA 승용차도 움푹 패인 둔덕이 많아서 달리지 못하는데 문득 택시기사 로버트는 이곳을 얼마나 많이 다녔기에 문제 없이 주행을 할까 엉뚱한 생각을 할 즈음 여지없이 싸로의 입방정에 신경이 예민해진다.

갑자기 그가 나의 동행자인 오스트리아인 거드에게 “넌 아리안, 나 또한 아리안. 그런데 토니는 아니야”라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거드가 내 눈치를 볼 것도 없이 강한 어조로 화를 내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딴 소리를 하냐”고 가로막자 싸로가 수그러들면서 거드에게 사과한다. 둘은 이미 농담도 하고 화도 내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래 아리안 민족이라고? 참 오랫만에 듣는 ‘아름다운’ 단어다. 아시아인인 나를 조롱하기 위한 서두를 아리안으로 선택하였나 보다.

슬라브민족에게 세계 1, 2차대전에서 패한 아리안족은 그들의 선진기술 즉 석유시추를 위하여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끌려가 카스피해 유전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슬라브의 남진을 위하여 코카서스 산맥을 뚫고 도로와 교량, 터널을 공사하여 아직도 튼튼하게 잘 만들어졌다는 역사를 갖고 있다. 슬라브족이 만들었다면 과연 오랜 세월 견고함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 그건 아리안 민족이기에 가능했으리라는 후문이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시베리아에 극동 오지 그리고 카프카스 이곳에 정착민촌을 이뤄 살다간 아리안족이 아닌가?

슬라브족의 어원은 Slave 즉 노예에서 유래됐다. 주로 볼가강 유역에서 집단 거주하던 슬라브족은 주변 강국에 의해 노예로 사냥되어 팔려 나간 슬픈 역사가 그 이름에 남아 있다.

수도 Stepanakert에 있는 NagornoKarabakh공화국 국회 전경.

2년전 아르메니아와 그 위성국 나고르노카라바흐공화국을 합해 총 인구는 약 400만명이었다가 1~2년 사이에 100만명이 줄었다. 변변한 지하자원이나 산업시설이 없다. 전세계에 퍼져있는 800만 아르메니아인 중 상당수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이스라엘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나머지는 북미와 유럽 등지에 살고 있다. 그들을 따라 희망이 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탈출 러시를 이루고 있다.

불과 1~2년 사이에 인구의 1/4이 국외로 이주하는 가운데

이곳 스테파나케르트에 가장 큰 건물은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이다.

보통사람들이 사는 집. 빈집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지 확인했고, 집 뒤켠부터 수리해서 고쳐 나아가고 있단다.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주변국에 불편만 주고 이스라엘에 대거 이주하여 유태인으로 살아가며 또 다른 비극의 상처를 주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아르메니아가 아닌가 싶다. 내가 만나본 최악의 개개인이 사는 이 땅, 이곳 아르메니아에 나는 왜 매번 고통과 상처를 입으면서 오는지 알 길이 없다.

다시 가정집 얘기를 하자면 이 지역은 다니면서 가정집의 특징 중에 하나가 창문에 틀이 없다는 점이다.

1992년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가스가 없었고, 가스가 없다는 것은 에너지 즉 전기가 안 들어오고 난방이 없었다는 의미다. 가장 앞서간다는 그들이 실제로는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서로 상대방을 인종청소하며 수년간 석기시대에 살았다는 얘기다. 물론 우랄산맥 서쪽과 카스피해 서쪽에 위치하여 간신히 선진유럽에 끼어 있어 혹한의 겨울에 가구와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 있었던 그들. 이마저 떨어지면 집안의 창틀을 벽에서 뜯어내어 땔감으로 사용했던 슬프고 가난했던 유러피언의 과거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내 이럴 줄 알았다. 교활한 싸로에게 속았다. 문을 보시라. 난 하도 어이가 없고 겁이 나서, 현실감이 전혀 들지 않는 상황에 카메라를 얼른 끄집어내 저 문을 들어가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이 연출될까 기록에 남긴다. 차는 비포장 산길을 돌아서 안개와 어둠에 갇힌 막다른 집에 우릴 내려놓고 사라진다. 안개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뒤를 돌아다보니 도저히 돌아갈 자신이 없다. 그래 어찌 되었던 들어가 보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본채는 약 오십여m, 칠흑같은 어둠 속에 떨어져 있고 신발은 진흙에 푹푹 빠지고 손질하지 않은 풀은 무릎까지 자라 걸음을 더디게 한다.

앞서가는 거드와 싸로를 보니 둘이 친해졌나 보다. 작고 뚱뚱한 싸로 녀석이 나에게 뭔가 오늘밤 보여줄 듯하다. 기대된다. 앞서 가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나를 이끄는 마귀처럼 보여서 섬뜩하다.

공포영화에 나옴직한 대문과 정원을 지나 본채에 들어서니?싸로의 부인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딸아이도 보여 마음 좀 편히 갖기로 했다. 짐을 내려놓고 저녁이 준비되었다기에 식탁에 앉으니 작은 고양이가 날 반긴다. 싸로의 빈정거림이 시작된다. 자리에 앉자마자 싸로가 날 보고 자기 와이프 동생처럼 생겼단다. 즉 나이가 어린 남자라는 거다. 해서 그 동생은 뭐하냐고 하니 마약 팔다가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 가부장권이 센 이곳에서 자기 친동생과 방문자를 비교해 조롱하는 태도에 부인은 남편의 권위에 맞서질 못한다, 나 역시 참는다.

내가 몇 살처럼 보이기에 동생 운운하며 그러냐 하니 막내동생뻘 아니겠냐며 우기길래 넌 몇살이니 물었다. 마흔일곱이란다. 나는 앞으로 나에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니 믿지 못하는 눈치다. 거드가 나서서 토니가 나이 많다고 하니 그래도 반신반의한다. 난 음식을 열심히 먹으며 그들의 얘기에 끼어들기 싫어서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눕는다. 그 자리에 있어봐야 위대한 유러피언이 내려다보는 하찮은 아시안에 변명도 대꾸도 귀찮고 이곳 벽지에 살면서 우물안개구리 세계관에 동참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지나서 그들이 저녁을 끝마칠 즈음 나와보니 자기들끼리 화기애애 분위기 좋다.

내가 나타나자 싸로가 나에게 자녀가 있냐고 묻길래 없다 대답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언어로 비웃는다. ‘그래, 남성이 부실해서 아이가 없다고 하는 거 다 알아듣겠다.’

싸로는 이제 나의 밑바닥까지 다 건드렸다. 이제 내게 더 이상의 인내는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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