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와 난민 시리아 북동쪽 ‘로자바’서 피어나는 한줄기 희망
[아시아엔=윤석의 <아시아엔> 뉴욕특파원] ARA뉴스는 9월 3일 “터키측 병사들이 자라블루스를 완전 점령하였고 알레포 방향으로 탱크와 군용차 등을 이동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리아 아사드정권은 터키의 개입을 반대하는 뜻을 밝혔으나 이미 국경은 그들의 손을 벗어난 지 오래다. ISIS는 터키와의 국경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고 신병을 들여오고 있었으나 주요 주둔지를 터키측군에 쉽게 내주었다. 로자바 혹은 시리아쿠르디스탄의 민병연합체인 SDF는 ISIS가 자라블루스와 알라이(al-Rai)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후퇴했다고 밝혔다. 현지 외신 역시 양측의 독특한 움직임에 주목했다.
터키언론은 군이 마레아와 자라블루스 사이에 난민들을 위한 안전지대를 만들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지역은 ISIS와 로자바가 난전을 거듭하던 지역으로 남쪽에는 ISIS의 수도가, 북쪽에는 터키와의 보급로 그리고 동서에는 로자바 들판으로 둘러싸인 전략적 요충지다.
미국은 쿠르드민병대를 테러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장기말로 여기고 있지만 쿠르드인의 해방을 원치않는 동맹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은 지난 8월 “미국은 통일된 시리아를 바란다. 우리는 쿠르드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런 유화정책이 터키의 자세를 변화시킬지는 의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ISIS와 협상하는 것이 민주쿠르드공화국의 탄생을 보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약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쿠르드인들은 여전히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앙카라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터키정권을 흑백분리 남아공 정권과 비교한 바 있다. 이들은 2015년 후반에 쿠르드 언론인과 활동가들의 체포 및 처형이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2016년 1월 터키학자 2218명이 터키 동남부의 쿠르드인 인권침해에 반대하는 평화서명에 참여했다. 그후 특히 쿠데타 이후 ‘평화를 위한 학자들’은 대규모 탄압을 당하고 있다.
반면 로자바는 쿠르드인들이 탄압받을 걱정 없이 쿠르드어를 사용하고, 쿠르드노래를 부르고, 쿠르드관습을 따를 수 있는 곳이다. 이는 쿠르드인들이 수 세기 동안 꿈꾸던 것이다. 로자바는 중동-서아시아에서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형태의 운동이다. 터키 국영언론이 주장하듯 마르크스레닌주의 쿠르드인민족주의운동과는 다르다. 세속적인 독재정치와 포퓰리즘 종교·정치 사이에 택일해야만 했던 험지에서 싹튼 로자바는 다양한 인종·종교·정치단체들이 연합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풀뿌리민주주의다. ISIS의 종교적 극단주의를 피해 떠나는 시아무슬림·드루즈교도·기독교도·야지디인·여성 등에게 로자바는 희망의 땅이다. 2014년 ISIS가 신자르산(Mt. Sinjar)에 야지디인 5만명을 몰아넣고 몰살시키려고 할 때 ISIS를 격퇴하고 3만5천명을 구출한 것 역시 로자바의 쿠르드민병대다.
시리아계 미국 외교전문가 마지드 라피자데는 “아사드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정치적 자유를 동반하지 못했기에 시리아내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세계화가 가져온 시민사회의 혼란과 공포를 ISIS는 역사를 뒤로 돌리라는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인 반면 로자바는 역사의 다음 장을 써내려가고 있다. PKK(쿠르디스탄노동자당) 창시자 중 하나이자 로자바의 정신적 지도자인 압둘라 오잘란은 로자바의 정치철학을 터키의 교도소에서 집필하고 있다. 그는 독립된 쿠르드민족국가를 요구하기보다 ‘비국가 사회계약’을 주창한다. 그는 또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여성혁명을 통하여 남성과 인간의 정신세계와 삶을 변화시켜야만 한다”며 여성해방에 기초한 국가연합을 로자바의 기초로 삼았다.
로자바헌법의 권력은 쿠르드·아랍·아시리아·찰데아·아라메아·투르크먼·아르메니아·체첸인들의 국가연합에서 나온다. 같은 다인종주의는 지역 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가연합’은 지방자치 정부가 중앙정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급진적인 헌법이다. 이렇듯 지방자치를 중앙집권 위에 세운 헌법은 “모든 인간은 개인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모든 사형을 금지한다” “여성은 정치·사회·경제·문화생활에 남성과 똑같이 참여할 불가침의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헌법은 남녀 누구나 입법의회 의원의 최소 40% 이상 할당토록 했다. 이같은 40% 원칙은 사법부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공공기관·단체·위원회에 동일하게 적용한다. 양성평등 원칙을 이러한 수준으로 고려하는 것은 로자바가 유일하다.
여성평등은 ISIS와의 전투에서 역시 로자바의 중요한 자산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로자바혁명이 ISIS의 사상에 정반대 입장에 서있다”고 주장한다. 종교지도자들이 약속한 천국을 믿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ISIS의 젊은 남성들은 여성에게 살해당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믿는다. 쿠르드여성들이 조직한 민병대 YPJ는 기강과 틀이 잡힌 군조직으로서 전장에서 ISIS를 상대로 연정연승하고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밝혔다.
하지만 로자바를 동시대 서구 여성주의의 실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로자바는 현 세계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거대한 폭탄이기에 서구열강들은 앞선 인권상황에도 불구하고 로자바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로자바의 무정부주의적 지방자치연합체는 분리독립 가능성이 있는 역내 모든 국가들에게 위협이 된다. 당장 쿠르드·체첸·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파키스탄·인도 등의 종교적·소수자들에게도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로자바 헌법은 모든 대지·건물· 지하자원 등을 공동소유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개인의 사유재산을 사용하고 즐길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나 다같이 못 사는 전시상황이 끝나면 어떻게 적용될 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무정부·여성주의·사회주의적 사상들은 전장에 참여하고 있는 어떠한 열강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상들이다. YPG(쿠르드민병대)에 자원입대한 영국인 마서 기포드는 “러시아와 미국의 정전합의에 로자바는 이미 존재한다”며 “전쟁터의 현실을 못보는 합의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트윗했다.
고대 아시리아제국은 전쟁과 풍요의 여신 이쉬타르를 숭배했다. 수천년이 흐르고 전화에 휩싸인 그 땅에서 여성주의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제법 어울려 보인다. 신자유주의와 신제국주의 그리고 가부장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자리 걸음하는 동안 시리아 북녘에는 여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쿠르드민족주의자, 난민 등이 모여 평화와 환경보호 및 여성해방을 위한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들을 돕기 위해 세계 주요도시에서 ‘로자바국제연대’ 단체를 조직했다. 그들이 어떤 활동을 펼칠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