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번역작업
일본의 내과의사 가카우치 요시유키씨가 저술한 책, 몸 구조와 병을 아는 사전을 의뢰 받았던 날이 한참이나 되짚어 봐야 하는 시간이 지나갔다. 세월이 빠른 것인지, 내 기억이 마치 어제 밤늦게까지 번안된 자료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생각이 아직도 새록새록한 것을 보니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것이 쉬운 듯하면서도, 재주만큼 나오지 않거나 생각대로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스트레스로 열병을 앓게 된다. 번역도 그리 녹록한 작업은 아니다.
아내가 일본어를 잘한다. 원어민에 가깝게 하다 보니 일본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덕분에 일본이란 나라가 단지 그 옛날 은원(恩怨) 관계만의 나라가 아니다. 참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미국이나 영국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일본은 그렇게 해서 내게 다가왔다.
“대전 발 영시 오십분~”이란 노래구절을 떠올리면서 대전역을 지날 때마다 어릴 적 들었던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대전역에 내려서 우동을 한 그릇 먹으면 추위에 떨던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는 이야기, 때로는 태평양전쟁-어르신들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한다-이 일어난 시절 놋그릇이며 징병에 끌려갈 뻔했다는 이야기며, 그 난리 중에 용케 살아남은 게 참 희한한 운명이라는 등 그 시절 진부한 이야기를 널어 놓으셨다. 아마도 일제에 대한 나의 ‘생생한 체험’을 말한다면 이것이 전부라고 할 것이다.
일본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번역해오던 아내에게 자연과학 서적 번역을 해보겠느냐고 의뢰가 왔나 보다. 말은 못하고 아내는 힐끔 눈초리를 나에게 돌렸다. “어떻게 할까?” 여인의 말은 그렇다. 앞뒤 없다. 몸통만 있다. 때로는 꼬리만 있을 때도 있다. 그래도 알아들어야 한다. 결혼 10여년 만에 겨우 알게 된 여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주저함 없이 오케이를 외쳤다. 뭐 잘 한다기보다는 한번 그 번역의 세계에 빠져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10여 년이 된 것 같다. 내가 일본어를 안다고? 천만에! 더듬거리며 가끔 읽는 소리가 오히려 소음에 가까운 것이 나의 일본어실력이다. 그런데도 쾌히 승낙하게 된 것은 기본기가 든든한 아내를 믿기에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가슴을 달구고 있었다.
그러나 근심이란 놈이 저녁 노을처럼 슬그머니 덮쳐오기 시작했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요즘처럼 악플도 많은데, 내용이 사실과 다르면 어떡하지 등등 생각은 꼬리를 문다. 하지만 다년간 경험자로서 아내는 걱정 말라고 한다. 당신은 그리 유명인이 아니니 주목받을 일이 없을 것이란다. 그렇다. 그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 받을 사람은 아니니 그 또한 나에겐 호재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디딘 번역서 관여일이 벌써 십여년이 넘어 간다.
부부가 같이 일하면 아무래도 마찰이 일어날 텐데 하는 걱정도 있거니와 이 세계의 룰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 인체에 대한 번역작업에서 전문용어에 대한 나의 견해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는 의미에서 역자와 소위 감수자와의 마찰은 넘기 어려운 큰 장애물이었다.
나는 미흡하나마 의학을 공부했다. 학문적 업적을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흐름이 어떤 것인지는 안다. 그리고 실제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더 나은 결정을 할 거라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의학은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잘 안다. 소위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니 그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관습이란 통념이 강하게 자리하게 된 것도 있거니와, 식자(識者)가 그만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외국 전문용어를 한글로 바꿀 때 전문가들에게도 생소한 단어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주관을 가지고 변화를 제시한다면 전문가의 주장은 수긍이 되어야 한다. 초기 번역서 작업에서는 그런 대중성에 입각하여 많은 의학적 단어가 일반인들의 뇌리에 익숙한 그대로 제시된 것은 거부감을 최소로 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역자와 많은 작업을 하면서 역자는 과학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점차 나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막연한 믿음에서 보다 논리적 사고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고지순한 절대선은 없다. 하지만 최선이란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각 분야에서 각자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영국에서는 해리포터의 소설에 나오는 많은 단어들이 신조어로 등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사례를 들어 전문가들의 업적, 가령 간단한 전문용어를 그런 사례에 비교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전문가가 쓰는 용어의 의미를 일반적인 용어로도 적용이 가능한 것은 맞는 일이다. 다만 전문용어는 쓰기에도 불편하고 들어도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 쉬운 것은 아니다.
올바른 전문가를 배출하는 사회, 사회의 건강한 구조를 유지 발전시키는 전문가의 양심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골격을 유지하게 된다면 그 어떤 풍파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훌륭한 구조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체구조 학습도감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고 세상에 나왔다고 알리는 통보가 왔다. 어렵지 않게 하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많을 것이므로 한편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항상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느 한쪽만 있어도 세상은 살아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잘 돌아가도 중심이 없으면 넘어지고 만다. 중심만 잡고 있으면 생명력이 없으니 그 또한 삶의 연속성이 없다.
출판된 책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앞선다. 출판사 사장님도 덩달아 부추긴다. 내친 김에 달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