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미스’라고 불러주세요
어느 날 진료실에 한 할머니가?돌보는 이와 함께 들어왔다. 키는 매우 작았다. 언뜻 보기에 내 허리에도 올 것 같지 않은 작은 키, 눈은?실눈처럼 아주 작게 뜨고 있었다. 얼굴은 둥글면서 오목조목 눈, 코, 입이 제자리에 잘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귀여운 얼굴이었다.?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진료실에 울려 퍼질 때면 시끄럽다기보다는 왠지 시원한?느낌을 주는 그런 음색이었다.
“어디 아프세요?”
환자를 만나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본다. 사교적이지 못한 것이 스스로도 좀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어디 아픈 데 없어. 이날 이때까지 어디 아픈 데가 있어야지.”
“아픈 데 없는데 병원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니, 전혀 아픈 데 없어. 뭐 밥 잘 먹고, 따뜻하게 잘 자고, 뭐 아픈 데가 있어야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잠시 밖에 나갔던 돌보는 이가 들어오다가 듣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ㅇㅇ양, 선생님 앞에서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우리한테는 아파 죽겠다고 그 난리를 치면서 말이지. 우리한테 한 것처럼 말해 봐요.”
그러자 헛기침을 하면서 “아이, 그땐 좀 아팠지. 이제 안 아파.”
나는 느닷없이 ㅇㅇ양이라고 부르는 그 돌보는 이의 호칭이 너무 신기했다.
“아니 ㅇㅇ양이라니요, 할머니한테”
그러자 그 돌보는 이는 크게 한바탕 웃으며 “아니 그게요, 선생님은 잘 모르지요. ㅇㅇ양이라고 안 부르고 할머니라고 부르면 난리가 나요, 난리. 아이고 나참, 꼬부라진 할머니가 ㅇㅇ양이라고 불러 달래요.”
그러고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면서 “담에는 미스ㅇ라고 하지요, 선생님한테도 ‘미스’라고 불러달라고 그래요.”
“이래 뵈도 여태껏 결혼도 안하고 처녀래요. 나참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들었으면 할머니지 뭘, ㅇㅇ양이라고 한데?”
나도 오랜만에 박장대소 했다.
“ㅇㅇ양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거기서는 아프다고 우리를 얼마나 들들 볶는지 몰라요. 어서 말 해요. 선생님한테 이야기 안하면 아무 소용없어요. 아니면 집에 가서도 우리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마.?ㅇㅇ양 !”
약간 투정어린 으름장을 놓자, 그제서야 ㅇㅇ양은 입가에 언뜻 미소를 띠면서 말을 더듬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고 저기 몇 걸음 가면 여가 묵직하게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뭐 잠시… ” ㅇㅇ양은 말끝을 흐린다.
“왜 이리 말을 못해요. ㅇㅇ양이 선생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네”하면서 목젖이 보일 듯 크게 깔깔 대고 웃었다. 돌보는 이는 성품도 시원하다. 자그마한 체구에 다그치는 말 속에서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여인이었다.
할머니는 의사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안 아픈 것도 아니다. 처녀의 부끄러움 같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 부끄러움은 평생을 가는가 보다.?여인만이 갖는 특유의 부끄러움이 있었지만 결코 수치심은 아니다. 그 부끄러움이 때로는 아름다움의 정수(精髓)로 느껴진다.
자칫 한 여인의 교태로 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 그 교태와는 다른 면이 있다. 부끄러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도,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도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다. 다른 병원에 있을 때도 그랬다. 당시에는 웬 청승인가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잘 모르는 그런 감성과 표현이 여인에게는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ㅇㅇ양은?미스였다. 그런 미스ㅇ가 이번에는 무릎 관절통증이 매우 심해져서 왔다. 확연히 심해진 무릎 관절통이 그녀의 걸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입원하시도록 권했다. 잘 나아야 될 텐데……!
요즘은 부끄러움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씩씩하고 용감한 여성이 많아진 탓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