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호칭(呼稱)
꽃동네에는 정신시설이 있습니다. 한 시설에 많은 가족들이 생활합니다. 여기서는 생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지만 그보다는 같이 먹고 생활하다 보니까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쉽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정신시설에 있는 모씨는 내가 멀리서 나타나면 멀리서?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그럴 때마다 돌보는 분이나 근무자 혹은 간호사가 ‘아버지가 아니고 선생님’이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몇 번이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도 몇 번이나 다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다시 한번 더 “아버지가 아니래도, 선생님!” 힘주어 말해보지만 그때만 잠시, 다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일그러지는 웃음을 지으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넘어질 듯 걸어갑니다. 부축하는 이도 힘겨워 보입니다. 그 모씨는 야위었고 웃을 때면 입모양이 일그러지지만, 웃음은 해맑습니다. 걸음걸이가 매우 불안하여 자주 넘어지기도 해서 머리와 앞 이마가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몇 년전 처음 볼 때 모씨는 거의 누워서 지냈습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를 찾고 있었고, 움직임도 매우 느려서,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일어서려고 하면 중심을 못잡고 휘청거렸습니다.?누군가 옆에 있으면 다행히 부축을 받고 앉거나 누울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머리는 사방으로 뺑 돌아가면서 한번씩은 부딪혀서 멍자국이 수두룩 했고, 어떤 날은 그 멍든 자국이 내려와서 눈주위를 퍼렇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다쳤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눈은 충혈되지도 않았고, 특별한 변화가 관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습니다. 정신시설 가족 혹은 생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실내 생활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헐레벌떡 진료실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데려온 사람은 그 모씨였습니다. 이마가 족히 4~5cm는 찢어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찌된 일인가 묻기도 전에 거즈로 상처를 누르고 지혈을 시켰습니다.
가족끼리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 모씨가 중심을 못잡고 넘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는 약간 의아해 했지만 한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으, 아 아 ~~ 저으가 확? 응’ 그가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 되지 않아서 목소리가 입안에서 뱅뱅돌고 있습니다.?그들이 만나기 전에 뭔가 신경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소통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결국 서로 몸싸움을 하기가 쉽습니다. 누워서만 지내던 모씨가 서 있다가 넘어져 다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일어서려는 의지도 대단했지만 같이 지내던 이와 다툼이라니! 내심 ‘인간승리’라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그 모씨는 수시로 머리를 부딪히거나 바닥에 찧고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둥근 원형이라기 보다는 약간 우주인같은 모양이 됐습니다. 늘 부딪혀 툭 불거진 앞이마, 횡하니 들어간 눈, 씩 웃으면 앞니 몇 개는 이미 부러져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비틀비틀 걸으니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투덜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좀 더 잘난 사람이 부족한 이의 버팀대가 되어 주는 모습에서, 기대하지 않은 그 모습에서, 사람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어려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상하게 보이거나 들릴지 몰라도 나는 이들이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는?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허물도 쓰지 않은 사람의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진실을 몸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삶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진리를 깨닫기 위해 무진장 노력합니다. 때로는 그 깊은 고뇌의 바닷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들도 간혹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가 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벌거벗고 지내는 어떤 원주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태어나서 생물은 어떤 것도 죽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니 가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창세기의 둘째 장이 생각났습니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