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와각지쟁
하긴 와각지쟁(蝸角之爭)으로 보일 것이다. 십수조인지 수십조인지 아니면 수백조인지도 모를 나라의 명운을 걸고 일을 하는 분들은 얼마나 가소로울 것인가. 이 틈에 와각지쟁(달팽이 촉각 위에서 싸움, 하찮은 일에 싸우는 것)이란 고사도 한번 알게 되었으니 그들의 박식함에 감사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료하는 의사, 그것도 질병과 관련되어 일을 하는 의사들은 그런 폭넓은 우주를 배우지 못했다. 설사 배웠다고 한들 쓸모가 없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데는 그런 넓은 우주가 아니라 작은 우주, 소우주 즉 인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도 없는 큰 우주의 논리를 개인의 진료영역에 적용하는 대범한 분들은 작은 우주를 몸 안에 담고 있는 분들이다.
수십년간 경제논리로 의료활동을 해온 의료인들도 있을 것이고,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 의료와 관계 없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소우주를 모르는 분들이니 탓할 일은 아니다. 나 자신도 소우주에 대해서 그리 잘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개인 차이가 많다는 단서는 달아 두어야 될 것 같다.
의료인들이 검사, 투약, 처치, 상담, 조언 등의 의료활동에 대해서는 경제논리와 접목해서 반갑지 않은 결과를 실험이란 말로 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넓고 광활한 우주를 엄청난 돈을 들여가면서 개척하지만 별로 개인의 실생활에 바로 와닿는 결과가 도출되기는 어렵다. 심지어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한 이견이 아니다. 이것은 개념의 문제라고 하고 싶다. ‘문제’란 표현이 너무 과격한가? 가령 만지고, 이야기 하고, 몇 번이고 쓰다듬어야 나오는 정책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을 저 멀리 있는 정책 입안자에게 화면만 보여주고 좋은 정책을 구상하고 기일 내로 제출하라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이것은 찬성-반대의 논리가 아니다. 의료계를 무작정 옹호하는 흑백논리도 아니다. 아마도 일부 의료인들의 마음속에는 환자의 정서를 느끼고, 말하지 못하지만 눈빛과 체온을 느끼며 진료하고 치료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힘들고 병이 깊어서 말할 기운도 없는 분들, 차마 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가뭄의 단비와 다름 아니다.
내가 의사이지만 환자일 때도 있다. 그런데도 그런 의사가 반가운 걸 어떻게 하랴? 어려운 사람들에게 실험의 대상이 아닌, 돈으로 줄 수 없는 것을 나누어 주는 의료정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조선일보> 12월4일자 A 34면에 실린 ‘최고 두뇌집단인 보건의료계가 주도권을 갖고 제안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란 글은 공감이 가는 말이다. 보건의료계가 최고 두뇌집단이 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최고의 두뇌는 어찌하여 보건의료계에 다 몰렸단 말인가?
산업과 진료를 같은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한번쯤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칫 산업의 결론은 ‘수익창출 후 배분’일 것이고-이는 경제의 문외한인 사람이 말하는 것이니 곧이 들을 필요가 없다-진료는 투자 후 수익창출이 사실상 전무한 것이다. 진료 후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제대로 치료가 되면 덜 아프게 한다든지, 다행히 나으면 직장에 잘나가는 것이다. 굳이 산업이라는 논리로 맞추어 본다면 병마에서 벗어난 사람이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들이면 그것이 진료 후 성과가 되지 않을까?
많은 산업이 그렇다. 연구 개발에 투자하고, 공장 짓고, 도로를 닦고, 배를 띄우는 등의 투자는 향후 물건을 만들고, 물건을 운송하고, 닦은 길로 많은 산업자재, 인력, 생산품을 운반하는 등의 물리적, 가시적 결과가 만들어지니 우선 상당한 손실을 가져올지 몰라도 미래의 생산가치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원격의료는 진료에 대한 투자가 되는 것이다. 그 투자에 대한 손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을 의료인이 떠안고 가야 하는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진정 의료인을 산업일꾼으로 생각한다면 원하지 않는 투자를 강제하는 것은 이 또한 어떻게 된 일인가?
원격의료가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잡아줘야 할 것이다. 무조건 원격의료를 반대하고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하면 최신의 기술이 환자들에게 그것도 제공자의 불편을 극소화 하면서, 이를 사용함으로써 진료의 질이 더 좋아지고, 환자와 의사가 만족하는 것이 된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서로 하고 싶어질 것이다.
갈수록 노년 인구가 많아진다. 노년 모두 튼튼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도 베이비붐 세대 막차를 타고 태어났다. 우리 시대 삶의 흔적을 후대에 짐으로 남겨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 선대는 국난 이후 어려운 경제생활을 윤택한 나라로 만들려 노력하였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나 생각할 때가 많다.
평생을 침상에 누워지내야 하는 중증장애인들에 대한 진료 방법은 의료계가 구체적 안을 내놔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