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다시 신뢰를 생각한다
참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글을 읽었다. 평소 참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많이 쓰신다고 생각하던 최재천 교수님의 <조선일보> 2013년 12월 31일자 칼럼 ‘신뢰와 칫솔’을 읽었다. 신뢰란 서로 믿고 의지하는 상태이지만 완벽하게 대칭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믿고 싶고 상대가 나를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어릴 적 어른들 말씀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흘러가는 말로 들었다. 무슨 말인지, 어떤 의미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우스갯소리가 더 재미있었다. 딸이 아빠 손을 잡으면 위기상황에서 손을 놓을 수 있으나 아빠가 손을 잡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서양인들의 이야기이지만 가슴에 와 닿는다.
외국 영화 <테이큰>에서도 아빠가 절대위기에 빠진 딸을 총알 같은 대응으로 구해내는 모습에서 그 신뢰를 읽을 수 있다. 평소 아빠의 일상생활이 보통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특별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알 길 없는 아내나 딸은 불만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냥 지켜봐야 하는 아빠는 말 못할 비밀을 가슴속에 담고 지냈다. 하지만 위기에 봉착한 딸을 위해 내 던지는 아빠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은 가족들, 그것은 가족애를 떠나 아빠로서 딸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큰 사건이었다.
말은 안하지만 아빠는 늘 그렇게 자신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영화일 따름인데 그 주인공처럼 날래지도 못하고 악당과 맞서 싸울 재능도 없어 속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아빠라는 존재는 늘 그렇게 음지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존재고, 아빠는 그 순간을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다 말없이 이 땅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나는 그 신뢰라는 말에 대해 무엇을 이해하고 있었나 되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우리 속담에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뢰도 그렇게 통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사람은 둘만 있어도 관계가 만들어진다. 관계는 신뢰가 기본이다. 그 신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과 서로의 물리적 교류가 필요할 것이다. 냉엄하다는 국제 질서에서도, 기업경영에서도, 개인 거래에서도 신뢰의 중요성을 내뱉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기업경영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도 신뢰라고 한다.
하물며 의사가 진료하는 순간은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부터 그렇다. 심지어 어느 병원에 갈지 정할 때부터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느 물건을 고르고 구매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상적인 소비 생활은 교환이 가능하다. 사전 탐색도 가능하다. 의사를 만나는 것에도 사전 탐색이 가능한가.
양질의 제품이라고 믿고 구매하는 것, 양질의 의사라 믿고 진료실에 들어서는 것, 그것이 신뢰가 될 것이다. 의학교육을 받고 국가 면허시험을 통과하면 의사 면허증만 나누어 주는 정도의 신뢰성이 만족스럽겠는가. 인성은 교육으로만 되지 않는다. 신뢰는 면허증 하나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의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파악해야 하고, 건강한 사회에 걸맞는 좋은 인력을 배출할 수 있어야 하며,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좋은 인력이 적절한 환경에 있어야 그 능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쪽이 신뢰의 탑을 쌓으면 다른 쪽에서는 그 탑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신뢰 유지도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말해준다. 교육과 노력으로 신망받는 인력이 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사회가 이끌어줘야 한다.
필요한 인력을 분석하고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며 사회에 기여할 터전을 마련하는 것, 기반 시설을 제대로 설치해 삶에 불편이 없도록 하는 것은 이 시대와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오차범위를 줄여 나가는 것으로 갈등의 폭도 줄일 수 있는 전문가를 한번 믿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