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진료의 조건

나만큼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을까? 소통의 전제는 대화다. 혼자서 중얼거리면 독백이라고 하니 대화는 당연히 상대가 있어야 한다. 한두 마디 대화는 가능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에는 도통 자질이 없다.

의사로서 생활하면서 터득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대화, 소통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와 대화를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돌이켜 보면 종합병원에서 수련 의사 생활하는 동안 대개 일방향 대화만 가능했던 것 같다. 사실 당시에는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시간이 흘러 현실과 부딪히면서 그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외과의사로서 생활은 상대 환자와 이야기 하거나, 보호자와 공통의 관심사 즉 환자의 질병을 두고 어떤 고충이 있는지 알아보고 힘든 점을 서로 이야기 하거나 할 여유도 그렇거니와 당연한 결과에 대해 어떤 의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환자나 보호자들을 위로한답시고 얼마 되지 않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그것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서 이야기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환자나 보호자가 그런 의사를 이해하려고 했었고, 의사 또한 그런 마음을 바쁜 시간에도 약간 미안함을 가지면서 병동 복도를 달려야 했다. 나의 미숙함이 그들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마음을 쓰다듬으면서….

요즈음 종합병원의 사정은 예전과 다를 것이다. 학술대회를 가도 예전과 다른 감성이 느껴진다. 주의 사항만 늘어나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도 이미 여기저기 널려진 의학상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먼저 그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해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의사는 의사대로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 결과물에 대해서만 제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위로의 한마디가 가져다 줄 불행을 오히려 두려워하면서 환자와의 관계 악화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대화, 소통. 이는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너무 썰렁한 대화에 나는 가끔 몸을 움찔할 때가 있다. 같은 이야기도 마음을 실은 것과 그러지 않은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동 명인이라는 분이 마을 골목에서 팔고 있는데 여전히 기계식 우동이 아닌 수제로 만든 우동을 만들면서 “힘들어도 이렇게 만들어 파는 것이 제가 고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는 말이 귀에서 뱅뱅 돈다.

갈수록 정형화, 형식화되어 가는 의료와, 마음을 나누어야 되는 의료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마음만 받아서는 받은 것 같지 않은 오늘날 환자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환자들에게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꽃동네 처음 올 때도 ‘소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소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몇 년이 되었는데 소통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보다 더 오래 생활 한 분들은 어떨까? 소통은 있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잘 되면 자기 탓, 못되면 소통 탓이다.

꽃동네 가족들은 지능이 낮거나, 장애가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누워서 생활하는 분들은 아예 발음이나 언어 전달 자체가 안되니 대화, 소통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을 못하는 분들이나, 의사전달을 제대로 못하는 분들, 여러 가지 정신장애, 지체로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오랜 시간 표정을 읽다 보면 말 잘하는 사람들보다 더 진솔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해관계가 없는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게 된다. 아프면 안 아프게 해주면 되고, 숨이 차면 덜 차게 해주면 된다. 못 걸으면 걷게 해주면 되는데 실제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돌팔이 의사다.

나는 진료할 때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늘날 진료실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의사를 좋아하는 병원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나 지금도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왜 이야기를 많이 해야하는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나무라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파보면 안다. 그것도 오래, 아주 많이 아파보면 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나를 위한답시고 친하다는 표현이 그렇다. “아무개 선생님은 오랫동안 환자를 본데요” 라고 한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 하든 그럴 때면 현실이 서글퍼진다.

환자와 대화를 더 많이 하도록 해야 한다. 가령 대화의 상대를 그날 10명을 넘기는 직업인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단순한 인사 정도가 아닌 그래도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대를 얼마나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회사 혹은 회의, 공적인 일로, 혹은 사적인 목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지 헤아려 보기 바란다. 아마도 열 손가락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의사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면 진료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부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의사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 의료는 갈수록 전문 기술을 요구하고 있다. 기술은 우리의 몸마저 바꾸어 가고 있다. 사람들도 이미 그런 기술의 향연에 빠져 들고 있다. 심리적인 문제, 정신적인 갈등, 고통은 정신과 의사에게 가면 당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좋은 해결은 아니지만 사람의 몸과 정신을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묘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다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임을 우리는 알았으면 좋겠다. 의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대화를 통해, 혹은 기술을 통해 도움을 주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사는 완성된 인격체가 아니다. 자신도 부족한 채로 세상에 노출된다. 오늘날 교육은 이런 완성체가 배출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 그것도 아주 편협된 일부 기술을 가진 인격체가 세상에 노출될 뿐이다. 과연 사회의 인격체들은 단지 그것만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생명은 절대 자신의 믿음과 신념에 달려 있다. 믿음이 있다면 신이 내려주신 생명의 물을 마시고 사는 자연의 피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명은 삶의 뿌리요, 기원이다. 고통의 산을 넘어서면 생명의 진정한 원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생명을 원할 때는 간절하면서도 그 생명에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뒤돌아선다. 그러면서도 천부의 권리를 논하고자 한다. 과연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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