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철학자 도장깨기] 키르케고르…니체와 실존철학 양대 거두

덴마크 출신의 쇠렌 오비에 키르케고르(Sőren Aabye Kierkegaard‧1813~1855년) 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다. 그렇다면, 독일 출신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tzsshe‧1844~1900년)는? 그 역시 실존철학의 선구자 호칭이 아깝지 않을 존재다. 그런데 두 철학자는 종교에 관해선 정반대의 접근과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이 공간에선 두 사람이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입장과 천착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먼저 키르케고르. 그는 어릴 때부터 섬약하였으나 두뇌가 명석하여 8살 때 들어간 학교에서 뛰어난 라틴어 문법과 작문 실력으로 교사를 당황하게 할 정도였다. 그 같은 학문적 소양을 쌓은 그는 17세 되던 해 부친의 권유로 코펜하겐대 신학과에 진학했으나 관심은 문학과 철학 쪽에 경도된 삶을 살았다.

결국 국가 신학고시도 포기한 채 방황의 길을 걷는다. 허약한 몸으로 술에 취한 나날이 이어지면서 죽음의 공포를 겪기도 한다. 당연히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만신창이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마구잡이 저술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 시절 가명으로 낸 책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공포와 전율>이었다.

<이것이냐…>는 실존의 1단계인 심미적 실존 단계를 표방한 책으로 “만일 그대가 결혼하다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또 후회할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설’을 설파한 책이다.

첫 번째 신앙 서적 <공포와 전율>

다음 <공포와 전율>은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하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 결박하였다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해치지 말라는 경고를 듣게 된 성서의 일화(창세기 22장)를 소재로 하고 있다. 키르케고르의 저작 중 <죽음에 이르는 병>만큼 유명할 정도로 관심을 끄는 동시에 논란도 많은 작품이다. 특히 키르케고르는 이 작품에서 실존의 2단계인 윤리적 규범을 뛰어넘는 예외적 적용으로 실존의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실존 단계를 다루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시점에서 ‘모리아산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받으시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만일 끝내 희생 제물로 요구하신다면 기꺼이 이삭을 바치겠다는 굳건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실존의 2단계인 윤리적 규범을 어기면서 칼로 이삭을 살해하기 직전까지 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이를 막을 것이라는, 그래서 그 순간 이삭을 구해내는 기쁨은 이삭이 태어날 때의 기쁨보다 더 희열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서 있는 정점이며 키르케고르는 그런 아브라함을 감히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키르케고르는 신앙은 기독교 국가의 안정적이며 사회적인 모임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포와 기쁨으로 충만한 좀 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키르케고르 후기 사상

키르케고르의 후기 사상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주요 대상이 된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인간 교사로서 인간 내면에 자리한 무지와 모순을 폭로해 주는 존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나 인간 스스로 도저히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폭로해 주는 존재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신뢰의 도약이었고, 그러하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각종 성사나 의식을 주관하는 ‘이성적인’ 교회 체계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는 신앙이란 보이거나 존재하지 않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란 모든 사람들과 결별하여 ‘신 앞의 단독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은 선별적이고 논쟁적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 기독교 체계를 흔들고 그 정체를 폭로해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덴마크와 독일의 주류 기독교 신앙이었던 루터교회를 혹독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2년 동안 <선전>이라는 책자를 통해 “공공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죄를 하나 덜게 될 것”이라고 기존의 교회 체계를 공격하였으며, 기독교란 그 자체로 너무 숭고한 것이기에 자신은 차마 기독교도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철학계에서는 그의 입장을 단순히 신앙주의라고 표현하는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자유가 반드시 실천적으로, 역동적인 실행력으로서 요구된다. 그의 독특한 체계로 가능성→현실성→필연성의 범주가 있는데, 그는 철학의 양상 범주로서 말하지 않고 본인만의 독특한 실존주의 철학으로 설명한다. 이 변증법적 연관을 맺는 것들이 자유, 책임, 진지함, 믿음이다.

키르케고르의 저작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말년의 사상을 압축, 정리한 것으로 그의 후기 사상, 즉 기독교적 사상에 대한 논의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절망의 세 가지 형태를 서술한다. 절망은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제시되고 있는 심미적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직접적 심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반성적 심미주의’이다. 전자는 동물적인 향락과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삶으로, 그러한 삶은 전적으로 필연에 의해 속박되어 있으며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상실한다. 반대로 반성적 심미주의는 인간이 예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세계를 무시하고, 오직 음모를 꾸미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키르케고르는 또 윤리적 실존의 대안으로 종교적 실존을 제시한다. 앞서 <공포와 전율>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브라함은 윤리적 기준에서 본다면 단순한 아들 살해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전적으로 고귀한데 그것은 신 앞에서 윤리를 포기하는 압도적인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같은 키르케고르의 신학적 실존주의의 견지에 따라 그는 마르틴 루터를 잇는 위대한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다. 그 같은 평가는 개신교와 가톨릭은 물론 정교회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전통, 권위, 성사들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오직 ‘신 앞에 선 단독자’에 주목하는 그의 개인주의 때문이다.

근대 철학이 모두 개인의 내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성을 향해 간다면 키르케고르는 초월 (transcendentia)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참조] 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1>
김선욱 著 자음과모음 刊 <죽음에 이르는 병 이야기>
수 프리도 著 박선영 譯 빙 刊 <니체의 삶>
도널드 파머 著 정연은 譯 <키르케고르 실존극장>
존 D. 카푸토 著 임규정 譯 웅진지식하우스 刊
헨리 해블록 엘리스 著 최선임 譯 지식여행 刊 <니체의 긍정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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