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신자(信者)와 힉스입자
영어로 believer는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다.?faith는?일반적인 믿음과는 조금 다른 종교적 의미의?신앙(信仰)과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가. 교회, 성당, 절, 모스크(이슬람 사원) 등에 다니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아 그러십니까?’ 혹은 ‘아, 예’라며 마치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인 듯 반가워한다. 또는 서로의 믿음에 찬사를 보내거나 좋은 일을 실천해야 한다며, 말의 시작과 끝, 혹은 도중에 신을 찬양하거나 나직하게 뜻모를 명사를 되뇌이기도 한다.
믿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편하게 사용한다. 보통 ‘믿습니까?’ 하면 ‘믿습니다.’ 답한다. 그런데 신자, 특히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보통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은연 중에 내세운다.
살다보면 고난을 겪기도 한다. 힘들 때 마음이 약해지기 쉽다. 경황이 없다보니 판단력이 약해진다. 평상시 멀리했던 사람에게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 생긴다. 그것은 갑자기 부유해질 때도 그렇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믿으십니까?’에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고난은 당신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출근길에 라디오 방송에서 고사성어로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는 짧은 멘트를 들은 적이 있다. 지미지악(智美之惡), 즉 완전한 아름다움도 완전히 악한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지미지악은 여씨춘추 거우에 나오는 말로 아름다움 속의 추악함을 알고, 추악함 속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도덕경에도 미추와 선악은 상대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도덕경이 구름에 떠가는 허망한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던 어느 후배의 말이 떠오른다. 도덕경을 보면 우울해진다고도 했다. 앞장을 몇 번 읽다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언뜻 참모습을 찾아내기가 어려워 보였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고 하고 싶었다.
지금은 돈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 옛날에도 그랬다. 지금은 더 많은 돈이 넘치는데 왜 부족할까?
여느 건물에 뒤지지 않는 큰 교회 건물, 더 많은 신자 확보를 위해 포교에 여념이 없는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이 절대적이라며 이분법적 설명으로 진실에 접근하고자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첨탑은 더 높아지고 성당은 주일에 몇 번 거행하는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또 다른 장소를 물색한다. 산속의 절은 이미 속세에 내려와 불당을 짓고 있다. 믿음이 깊은 분들은 사후에 자신의 영생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종교적 신망이 높은 분에게, 혹은 사원에 자신의 많은 부분을 바치기도 한다. 속내는 감추고 마치 자신은 절대선에 다가가고 있다며 문제만 하염없이 던지고 있는 이들은 무슨 마음일까?
덩치는 이미 성인 키를 훌쩍 넘었는데도 그저 언니, 아부이, 정도만 말하는 여인이 있다. 홀쭉하게 마른 체형을 하고 뒤뚱거리며 걸을 때면 훅하고 불면 넘어질 듯 싶다. 머리는 앞뒤가 짱구인지라 커다란 눈이 그 넓은 머리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크다. 입가에는 항상 침이 흘러 내려 하얀 줄무늬가 턱언저리까지 뻗어 있다.
그런 그가 오늘 넘어져 이마가 깨져 왔다. 내가 오고도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부러진 앞니를 쑥 드러내면서 우는 듯 웃는 듯 씨 그런다.?‘아부이, 아파!’ ‘아부지’
정신지체가 심한 사람은 성장해서 말을 해도 그 언어적 표현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더듬거리며 뻗어오는 손은 마디마디가 불거져 있고, 땟국물이 손등을 덮고 있다. 그런 손이 더듬거리며 나를 더듬을 때는 주위에서 주의를 주며 나무라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가볍게 응수한다. 서로가 힘들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이 앞선다.
가끔은 그녀의 눈망울 속에 정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내미는 땟국물이 흐르는 손에서 사탕을 받아들며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은 돈을 많이 벌어 어깨에 힘주고 만족하는 듯 득의에 찬 웃음을 지어 보인다거나 눈동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상대 권력에 약간은 비굴하게 홍채가 흔들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눈동자는 각막, 수정체, 초자체, 망막을 거쳐, 시신경 그리고 후두부의 시각영역에 이르기까지 뇌와 거의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물리적 성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그 신경의 세계가 보이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느낀다면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믿음을 볼 수가 있다.
영혼이 없다는 사람들과 삶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함께 숨쉬고 살아야 하는 절실함이 어우러져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혼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대어 사는 영감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힘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런지. 하느님이라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이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일은 아닐지라도 아마 힉스입자 발견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하느님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만의 궤변에 불과할 수 있지만 ‘도가도 비상도’인 것이다.
나의 신념은 영성, 성령, 사랑 등 그럴듯한 좋은 말에 끌리는 것에 있지 않다. 막연한 믿음 보다느 과학적인 말이 좋다. 그래서 힉스입자가 좋다.?질량을 부여한 입자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를 믿으니 나는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기도해서 복을 받는 그런 신자는 못된다. 육체는 언젠가 없어진다. 사라진다. 그리고 무(無)가 된다. 입자가 있기 전의 상태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신자가 된다. 만물은 질량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것, 보이는 모든 것은 질량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꽃동네 가족들, 특히 사랑의 집, 희망의 집 장애인, 부랑인들, 그리고 하루종일 누워서 지내는 이들도 아마 신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