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무의 진료실] ‘아, 불쌍한 사람들!’
영화 ‘레미제라블’이 나왔다기에 어느 휴일, 조조 티켓을 끊어 가족과 함께 영화관으로 갔다. 딸 아이는 영화가 끝난 뒤 여운 때문인지 한참동안 멍한 모습이었다. 그랬다. 영화 속 주인공 ‘장발장’은 불쌍했다. 육당 최남선은 레미제라블을 ‘너 참 불쌍타’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소설 ‘레미제라블’은 당시 시대상황을 극적으로 잘 묘사한데다 일각에서는 사회참여 의미를 부여하기도 해 많은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다. 사회는 복잡한 인간관계의 장(場)이다. 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항상 그 일면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성 또한 절감하게 된다.
장발장과 은촛대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배고픈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의 징역형은 너무 가혹하다는 추측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 또한 중요한 관찰 대상이었다.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자신의 신념과 다른 장발장의 믿음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결정을 하게 되지만 나는 그 자베르 또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은촛대로 인한 한 인간의 깨달음이 이토록 많은 은총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이 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일부에서는 코젯과 사랑하게 되는 마리우스와 그 동료들의 실패한 혁명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보는 사람마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주인공 장발장은 바리케이트에서도 오로지 코젯의 사랑을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임무, 즉 폰틴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코젯과 같이 살아가면서 애정과 의무를 다 하는 장발장은 본성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재산과 시장이란 명예직을 벗어버릴 만큼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감정에 휩싸여 돌발적인 행동을 할 때 이성을 잃고 행동한다고 말하는데, 이성적 행동이란 오히려 이해타산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 않고 뛰어드는 사람을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별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한다. 사실 태양과 같은 강렬한 빛이 있을 때 그런 작은 별빛은 그 속에 감춰져 버린다. 하지만 그 별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어둠 속을 비추던 별이 안 보이게 된 것을 깨닫고 무관심했음을 떠올리며 사라진 별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코젯, 마리우스, 자베르 경감 등은 자신의 인생에서 장발장이 그런 별과 같은 존재였음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미 그 별은 고요하고 깊은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 주변에는 이런 별과 같은 존재가 없었을까. 실제 숨 쉬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시간과 꿈속에서 떠돌다가 결국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걸어 다니고, 음식을 먹고, 숨을 쉬고,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들인가. 이미 이 세상은 풍요로워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오히려 더 부족한 시대가 된 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이미 스크루지의 욕망처럼 황금이라는 굴레에 갇혀버린 것 같다.
의술의 발달은 그 도를 넘어서 소비자의 욕구를 채우기에 바쁘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면 하얀 주사액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핏줄에 주입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모습을 표준화 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는다. 팽팽하고 반지르하게 윤이 흐르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이라는 시계는 돌릴 수 없으니 그 어떤 기술도 당신의 가벼운 마음을 툭 건드리고 지나갈 뿐이다. 자연의 섭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거스를 수 없다. 과학은 그 자연의 섭리를 연구하고 위대함에 감탄한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는 있지만 신의 뜻에 저항하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의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생명의 진화 또한 신은 계산하고 있지 않았을까? 인간의 욕심마저도 말이다.
자아를 버리지 않고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장발장은 찾았던 것 같다. 자신을 버린 장발장은 그래서 완성이란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우스가 부르짖는다.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성인(聖人)이십니다.”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부모님이, 힘든 몸을 이끌고 나의 진료실에 찾아와서 부족한 의술에 의탁하는 그들이 나의 성인(聖人)이시다. 나의 허물이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들을 때도 나의 성인(聖人)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