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속으로] “문명 비켜선 오지 중 오지, 을수골 가는 길서 만난 사람”
지도에 없는 땅, 오대산 속 심마니 이규환 이야기
[아시아엔=박상설 캠프나비 대표] 오대산 북쪽 산골짝에서 굽이굽이 내려도는 계곡물 따라 녹음이 짙은 꽤나 험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 오른다. 하루 만에 끝까지 도달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길…. 몇날 며칠을 겨냥해 걷고 싶은 길이다.
강원 홍천군 내면 56번국도의 광원교에서 ‘을수(乙水)골’을 따라 6km 들어가면 ‘내린천발원지’라는 돌푯말이 나타난다. 이곳이 북한강 줄기의 시발점이다.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는 지류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골이 깊어 요동치는 물줄기가 합쳤다 흩어지며 거칠게 도망치듯 떠내려간다. ‘을수골’이란 이름은 계곡의 모양이 새 을(乙)자 모양으로 들락날락 굴곡이 심하다 해서 붙였다고 한다.
오대산 등산로는 거의가 월정사~상원사를 거쳐 오르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없는 오대산 북쪽 을수골에서 호령봉을 거쳐 오대산에 이르는 원시의 숲길을 즐겨 오른다. ‘숲의 유혹은 이러 하구나….’ 한동안 넋을 잃고 주저앉아 심산유곡에 빠져든다. 길섶에 온갖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는데 바람이 씨앗을 데려다 준 것인지, 바람에 쫓겨서 난 것인지? 자리를 탐하지 않고 때맞춰 저마다 필 자리를 알고 피고지는 꽃은 시원(始原)의 아름다움인가. 계곡물 한 모금에 여름은 저 멀리가고, 술 한잔 못하는 나도 시원한 맥주가 당기는 한여름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사람을 만나도 그냥 무덤덤하게 대하는 진국이 있다. ‘이규환’은 산에 사는 사람이다. 그를 14년 전 등산길에서 처음 만나 그 후 10년 전 서너번 만났다. 그 당시 56세였으니 올해 일흔은 되었을 것이다. 그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지만 무턱대고 찾아나섰다. 을수골 끝자락에 버려진 낡아빠진 오막살이집 한 채 덩그마니 있다. 그곳이 이규환이 혼자 살며 산삼과 약초를 캐며 머무는 곳이다. 그는 심마니다. 그런데 오래 전 그 밭이 남에게 팔려 어딘가로 옮겼다고 한다.
천개의 산과 계곡, 거기에 선사시대 심마니가 있었네!
그는 오대산과 계방산에 갇혀서 사철을 견딘다. 여름에는 혀를 빼물고 헐떡이며 인간의 마을을 떠나 심마니의 나이테를 다한다. 봄가을에는 해발 1000m 높은 곳에 움막을 치고 기거한다. 수집한 산나물이며 약초를 현지에서 건조시킨다. 채집한 것을 집으로 운반하기엔 사나흘 해도 모자라기 때문에 여러 날 토굴에서 견디지 않고는 무슨 딴 도리가 없다.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숲과 바람뿐…. 고절(孤節)은 절정에 이룬다.
10여년 전 이규환과의 첫 만남에서의 짧은 대화 한 토막이 떠올랐다.
왜 혼자서 산에 사는가.
“산이 좋아 무턱대고 산에서 산다.”
언제부터 그랬나. 생활은 무엇으로 꾸려가나.
“서른 대여섯살 때부터다. 약초와 야생벌꿀 산삼 등을 캐 근근이 살아간다.”
왜 딴 일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산에 갇혀 사나.
“배운 건 없고 사람 틈바구니에서 살기 위해 아우성치는 것이 치사해서다. 자연에는 그런 게 없다.”
가족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나.
“가족을 떠나니 가족들은 둥지를 떠난 새들처럼 각자 살길을 찾아 다 잘 살더라.”
그럼 가족 생계비는 누가 감당하나.
“심마니 초기에는 벌이가 신통치 않아 동물처럼 지냈지만, 입산 후 5년부터는 약간의 여유가 생겨 가족에게 보내준다. 아들은 울산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믿을 만한 전자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맑게 살아가는 생의 불꽃
이런 일도 있었다. 나와 절친하게 산에 다니는 사람이 2002년 심산유곡에서 자연생으로 자라는 석청꿀이나 목청꿀을 구해달라고 하기에 이규환을 찾아 부탁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 알고 있는 깊은 산골에 오래된 참나무에 목청이 있으니 가을에 같이 가서 목청꿀을 거두는 것을 직접 보고 사가라는 것이다. 그래 우리 일행은 등산을 겸해 목청꿀이 있다는 깊은 산골짝에 들어가 망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수확하는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그리고는 1kg에 50만원 하는 목청꿀을 220만원에 모두 사들였다.
말수가 적은 그를 잘 구슬러서 얘기를 들어보니 고향은 울산 어디인데, 젊을 때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한다. “왜 나왔느냐”고 하니까 “그냥 집이 답답해서 나왔다”고 한다. “가족과 연락이 되느냐”고 물었다. 이규환이 답했다. “연락은 뭐…. 생각나면 내가 집을 찾아가도 되는 거고, 자기네가 찾아와도 되는데…. 아마 1년에 두세번 정도 만난다. 아예 이혼하고 등지고 사는 건 아니고 서로 어찌 어찌 연결은 된다.” 그가 환갑을 넘긴 몇년전에 또 만났을 때, “그래 가족 버리고 헤어져서 사는데, 편해?”하며, 내가 들이대고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가족이란 울타리를 털어버리니 오히려 다들 더 잘 살아요” 한다.
어째 그러냐고 물으니, “제 일은 제가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지, 아들은 스스로 직장을 마련해 잘 다닌다”고 한다. 자기는 혼자 나와서 사니 TV이니 신문이니 하는 것도 안 보고 산삼만 찾아다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늙어가며 산삼 연구에 매달렸다고 했다. 그래서 수원대 대학원의 삼산연구팀에 다니게 되었고, 작년에 수료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산속에서 지내면서 믿는 게 있는데, 교회당의 예수님이나 절간의 부처님은 아니란다. 그만이 믿는 무슨 도가 있는데, 토굴에 써붙여 놓고 늘 절을 올린다고 한다. 우리의 토속적인 것과 비슷한 무슨 성황당 같은 것으로 천지 신을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뭔지 통 알 수가 없다. 심마니들이 산삼 캐러갈 때는 늘 무속적인 제사를 올리는데 그런 종류의 신앙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홍길동이 하였다는 전설같은 축지법을 익혀서 산속을 빠른 걸음으로 싸다닌다. 그는 산악마라톤 선수를 능가하는 재능이 있을 거다. 하기야 어떤 믿음을 갖고 있더라도 그의 마음에 가득 차있는 용맹은 단호하고도 아득하였다.
눈물과 환희의 길은 강물처럼 흐르고
이규환은 먹는 것도 옛날 보릿고개 가난할 때와 같이 노상 감자와 옥수수강냉이 등으로 끼니를 때운다. 돈이 모이면 가족한테도 보내주고, 아껴서 남긴 돈으로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티 안내고 전화도 놔주고 부족한 게 있어 아쉬운 소리 하면 보태주고 지낸단다.
오지 산골을 찾아다니던 필자는 우연하게도 농경시대를 넘어 선사시대로 돌아간 이규환을 만나 첫눈에 반했다. 내 삶의 원칙은 요컨대 내가 만들어 나만의 삶이라 여겨왔는데 나를 뛰어넘는 이규환을 보고 그 앞에 무릎 꿇는다. 그가 좋아하는 자연의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위해 기댈 언덕도 피할 절벽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한(恨)을 풀기 위해 궁핍과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는 그가 ‘참자연인’이다.
그는 자연에 미치고 빠진 사람이다.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들어간 미국인 솔로와 같은 사람이다. 솔로는 일상의 모든 걸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 속에 묻혀 100살까지 살았다. 솔로는 이름난 배운 사람이여서 좋은 환경에서 살았지만 이규환은 배우지도 못하고 그 솔로란 사람보다도 몇 배 험난한 곳에서 토굴생활을 하며 홀로 맨몸으로 땅을 붙들고 통곡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맑은 가난!! 문명의 거품을 걷어치우고 소박하고 간소하게 살아야한다는 명료한 답이 그의 처절한 행동 속에 살아있다. 우리는 토굴생활은 못하더라도 씨 뿌리며 가꾸며 산에 가며 푸른 숲속에서 모든 고뇌와 번뇌를 치유하는 흉내라도 내야겠다.
혼자이고 싶다.
하산 길에 무슨 인연이 닿았던가? 10여년 만에 이규환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반가워하지도 않고 무덤덤하다. 아직도 토굴생활을 하는가 물으니 오대산에는 국립공원 규제로 못하고 계방산에서 한단다.
그냥 그러고 헤어졌다. 그나 나는 살길과 죽음 길을 포개고 산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겨우 눈치 보며 사진 두 장 찍고 안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