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숲의 속삭임이 들리시나요?
빗소리, 한가로운 자유!
6월의 신록이 비에 젖는다. 푸른 잎사귀가 알몸으로 춤을 춘다.
풀잎도 제각기 수런거리며 흥겨워 흔든다.
뽀얀 안개 풀길의 아카시아 꽃, 물씬 콩 비린내 따라온다.
빗소리 숲으로 계곡으로 지나며 촉촉이 가슴을 적신다.
농막이 비에 젖는다. 빗줄기는이 끊겼다 이어졌다 쉬어간다.
허술한 농막이 고맙기만 한 이 밤.
계곡의 낭랑한 물소리 그렇게 가슴을 움켜쥐고 지나간다.
마음을 축이는 하늘의 소리, 청정한 生의 소리, 이젠 안다.
흰 갓 털을 쓴 민들레 홀씨 비에 젖는다.
힘없이 부유하는 민초 떠돌이 민머리 비가 반가워.
길섶 민들레 홀씨 비를 붙잡고 그리운 깃털을 부여안는다.
벼슬 못해 탕건을 쓰지 못한 빡빡 깎은 깐돌이 민중은 그런 것.
나무가 비를 맞으며 온몸으로 세상에 닿으려고 아우성친다.
자신의 무게만큼 비를 머금고 여름을 부른다.
가을에 낙엽지고 겨울에 나목이 되는 일이랑 아예 잊었나 보다.
마냥 서서 세월 모르고 살아가는 네가 최고다.
봄을 지나 솟구쳐 오르는 신록과 풀섶에서 인간은 자란다.
출렁이는 초여름의 물결은 생명의 원천.
새 옷을 갈아 입는 여름이 오면 나도 모르게 연두색이 된다.
도심에서 햇볕 한 자락 들지 않던 세월이 이제사 알겠다.
이튿날 가랑비 내리는 새벽, 밭에선 솜털 입은 애기 손가락만한
여린 오이가 줄기에 매달려 떨고 있다.
밭두렁엔 올해도 어김없이 금낭화, 귀한 손님으로 찾아왔다.
모든 꽃은 화사하지만 금낭화는 연한 보라색을 입고 소박하게 고개 숙여있다.
하도 수수해 사람에 비유하자면, 알뜰살뜰 사는 사람에게는
요즘 같은 불경기나 사회혼란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화 그대로 일 것 같다.
어느 해 가을 깊은 산 계곡 언저리에서 매발톱 꽃씨를 한줌 거두어
샘골농원에 심었다. 노랑매발톱, 흰하늘매발톱, 하늘매발톱 꽃이 첫해에 몇 뿌리
피어나더니 이듬해 더 많이 번성해갔다. 이른 봄에 여기저기 모종 하니
지금은 매발톱 야생화 밭이 되었다.
30~50cm 키의 줄기에 서로 어긋나는 잎은 3갈래로 깊게 갈라지며 뒷면은 흰빛이 돈다.
6~7월 가지 끝에 적갈색 꽃이 1개씩 밑을 보고 핀다. 위로 뻗은 긴 꽃 뿔이
매 발톱처럼 안으로 굽은 모양이어서 ‘매발톱꽃’이라고 한다.
작은 걸음의 흔적으로 봄, 여름, 가을 야생화를 즐기는 村老人의 즐거움을
그 어디에 비할소냐.
농원 숲에서 짹짹대는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어려서 날지 못하는 작은 새끼 두 마리가 아장대고 있다. 아마도 새 둥지에서 떨어져 고아 신세가 된 것 같다.
어미 새는 소나무에서 쉴 새 없이 울어대며 안타까워 한다.
그러나 어미 새는 새끼를 등에 업고 둥지로는 못 갈 듯, 이 일을 어찌 하나?
빗속에서 헤매고 있지나 않나? 어미 새와 만났을까? 굶어 죽었나?
딴 동물에 잡혀 가지나 않았나?
자연생태계에 대한 배려는 삶을 맑게 해준다. 농약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잡초는 힘 닿는데까지
뽑되 나머지는 작물과 같이 자라는 ‘생명 농법’으로 환경을 생각하며 영농을 한다.
나는 샘골의 농사를 농업기술이나 생산성에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생명이 살아 숨쉬는 ‘레저영농’을 지향한다.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명은 자연에서 생을 받아 스스로 살아가다
‘반드시 죽어야하는’ 자연에 귀의하게 된다.
제 아무리 잘났다고 날뛰어봐야 별 수 없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자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의 삶의 고통은 ‘자연중심’의 원초적 삶을 배반한 죄 값이다.
나는 <농업 성전>(An Agricultural Testament, 알버트 G. 하워드 저)과
<생명의 醫, 생명의 農>(야나기 세 기죠 저, 최병칠 역)의 두 책을 가까이하고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생명의 농사를 지으려고 힘을 쓰고 있다.
파종한 농작물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나고,
온갖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 농작물을 덮친다.
우리가 사는 게 그날이 그날 같아도 똑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는 것을
샘골에 와서 일을 해보면 절실하게 느낀다.
자연은 보이지 않게 변하면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기쁨을 준다.
보이지 않는 기쁨!! 돈 안 드는 기쁨!!
이 기쁨의 원천은 자연 그 자체이며 그 자연은 제 스스로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며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기쁨을 준다.
먼데서 기쁨을 찾을 게 아니라 잔소리 없는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
왜 도시생활의 일상에서는 이런 무상의 멋스러움이 없을까?
사람들은 보이는 기쁨이 기쁨의 전부라 여긴다.
자연의 기쁨!
무엇으로 이 기쁨을 사랴? 어디까지 내 기쁨인가?
기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나머지는 모두 욕심이다.
이대로 충분하다.
이제 산으로 들로 바다로 떠나자.
집을 버리고 자연에 나가 ‘텐트를 치고’ ‘때려 부수고’ 또 떠난다.
모험 없는 인생은 가련한 삶. 무엇이 두려운가? 돈, 일, 부모, 남편, 부인, 자식, 애인?
아니다. 습성의 굴레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