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나의 유언장

이달의 나침반(2010년10월)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일은 해가뜨고 지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생업에 쫓겨 정신없이 도시 속에 파묻혀 있지만 지금 샘골에는 들국화, 개미취, 산 부추, 구절초등의 야생화가 한창입니다. 나는 이 꽃 저 꽃 중에서도 들국화를 제일 좋아합니다. 들국화는 아무데서나 피지 않고, 한 발작 물러나 한적한 양지바른 곳에 자리 합니다.

연 보라색의 화려하지 않은 쓸쓸한 자태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 언저리에 억새풀이 나부기는 정경은 가을을 한층 짙게 합니다.

9월 하순 4일간을 샘골농원에서 캠핑하며 비닐하우스 보온 덮개와 해 가리게 차양 공사를 하였습니다. 샘골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제는 알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유언장을 공개합니다.

유언은 가족에게만 은밀하게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람은 사회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고 있기 때문에 공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의 경우는 나의 가족에게만 매몰되어 사는 게 아니라 집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야성의 유목민을 자처하는 ‘노마드’ 여서입니다. 가족과는 오래 전에 이미 쾌히 합의 하였고, 사람의 몸은 자기 몸이기도 하지만 생을 끝내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앎’은 인생(人生)을 철저히 지존(至尊)하는 다짐입니다.

영정사진, 1987년6월20일 덕유산 정상의 일출 <사진 = 박상설 제공>

유언장
1. 사망 즉시 연세의대 해부학 교실에 의학 연구용으로 시체를 기증한다.
2. 장례의식은 일체 안 한다.
3. 모든 사람에게 사망을 알리지 않는다.
4. 조의 금품 등 일체를 받지 않는다.
5. 의과 대학에서 해부실습 후 의대의 관례에 따라 1년 후에 유골을 화장 처리하여 분말로 산포한다. 이때 가족이나 지인이 참석 않는다.
6. 무덤, 유골함, 수목장 등 흔적을 일체 남기지 않는다.
7. 제사와 위령제 등을 안 한다.
8. ‘죽은 자 박상설’을 기리려면 가을, 들국화 언저리에 억새풀 나부끼는 산길을 걸으며 그는 ‘그렇게도 산을 좋아했던 산 사람 깐돌이’로 기억해 주길 바란다.
9. ‘망자 박상설’이 생전에 치열하게 몸을 굴려 쓴 글 모음과 행적을 대표할 등산화, 배낭, 텐트, 호미, 영정사진(덕유산 정상에서 새벽 해돋이 사진) 각 1점만을 그가 흙과 뒹굴던 샘골농원에 보존한다.
10. 시신기증 등록증.
등록 번호: 10-344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과
전화: 02-2228-1663

장면 #1

나는 산길을 걸었습니다. 길이 여러 갈래가 있었습니다. 사람 발길의 흔적이 적은 길을 택했습니다. 얼마 안 가 길의 흔적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길 없는 숲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길 없는 곳은 길을 만드는 방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모든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남들이 안가는 길을 가니 심오한 자연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길 없는 길을 갈 것입니다. 남들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험난한 숲을 헤쳐 나가는 고생이 없다면, 도착한 후의 보람은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내가 원하는 길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려면 직접 해봐야 압니다.

내 식 대로 살다, 떠날 때도 내 식 대로 떠납니다. 내 가족을 위시해 모든 사람에게 번거로움 끼치지 않고 원래의 자리인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사진 = 박상설 제공>

장면 #2

모든 사람에게는 미래의 노인과 죽음이 같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늙음이나 죽음을 피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중 ‘늙음’에 대하여 유난히도 꺼려하고 ‘죽음’은 아예 남의 일처럼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금기를 깨뜨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숨겨놓은 ‘늙음과 죽음’의 정체를 나는 나와 공유합니다. 우리는 ‘늙음’을 마치 수치스러운 죄인쯤으로 여깁니다. 다른 사람의 늙음은 보이지만 자신의 늙음은 보이지 않는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늙음이 쳐들어 오는 것을 막으려고 ‘다이어트’ ‘에어로빅’ ‘건강식’ ‘찜질방’을 전전하며 위로받으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래봐야 모두 소용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자연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흰 머리카락 하나 주름 하나를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을 고생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리는 저무는 기호입니다.

인간들은 말합니다. 흰머리, 주름은 자기가 만든게 아니고 억울하게 만들어진 애물단지라고? 이게 인간의 원초적인 착각이며 비극입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것 이 아니라 자연의 길입니다. 자연은 만물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연에 거역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럼으로 ‘人生’을 의연하고 슬기롭게 지내야하고, ‘죽음’을 묵묵히 맞아 들여야 합니다. 공부중의 공부는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자연이 시키는 대로 그 품에 안길 뿐입니다. 인생 순례 너무나 만족하고 즐거웠습니다.

인생 순례 마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깐돌이 박상설

One comment

Leave a Reply